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림 May 17. 2024

먹는 인간이 읽은 <먹는 인간>

헨미 요(박성민 옮김), 메멘토(2017)

며칠 전 먹은 도미 세비체


오늘은 뭐 먹지?  

하루도 빠짐없이 고민한다.

휴대전화엔 먹은 음식 사진이 가득하다.

더 맛있는 것을, 더 취향에 맞는 것을 먹으려는 모습에 배가 불렀다는 생각을 한다.

실제로 매일 배불리 먹는 것도 맞다.


혀, 소화기관, 뇌를 통해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즉각적인 보상 행위. '먹기'는 생존 이상의 행위가 되었다.


SNS 시대의 총천연색 음식 사진은 보는 것만으로 도파민을 자극하는 버튼이기도 하다. 본능과 자본주의적 욕망을 찔러댄다.


요리를 즐기고, 맛집들을 찾아다니고,

음식 사진을 찍어대는 나에게 '먹기'는 어떤 행위인가?

먹는 걸 좋아하면서도 일련의 행위가 가볍다고 느껴져 회의감이 들던 찰나, <먹는 인간>을 읽었다.



'먹기'의 의미를 다른 사람은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예상과 달랐다. 이건 1994년 일본 기자의 르포였다.


작가는 집필 당시 빈곤, 전쟁, 질병의 현장을 찾는다.

먹을 것이 없고, 먹을 수가 없고, 먹으면 안 되는 곳에서도 우리는 '먹는 인간'임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지역에서도 인간은 먹는다.

그곳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방사능 대신 보이는 음식을 믿는다.

생존이다. 보이는 걸 잡는다.

먹을 수밖에. 우리에겐 어쩔 도리가 없다.


일본인 통신사 기자인 작가는 한국에서

고 김복선·이용수·고 문옥주 위안부 할머니도 만난다.

피해 당시 음식과 관련한 기억을 듣기도, 함께 밥을 먹기도 한다.

그들의 기억을, 삶을 곱씹는다.


소녀들의 마음은 바닥에 짓이겨진 떡처럼
갈기갈기 찢어져 버렸다.
떡은 반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짓이겨져 있다.
이 할머니는 지금 불면증이 있다고 한다.
새벽녘에 뒷산에 올라가
한스러운 마음을 모조리 소리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잠이 든다.

기억이라는 것을
우리가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50년 전은, 여전히 꽤 많은 사람들에게는
어제와도 같은 날이다.
(336쪽)


어떤 기억은 아무리 곱씹어도 소화가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먹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먹는 걸 즐기면서 한편으로 왜 가볍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통신사의 외신부 데스크를 맡고 있었고,
넘쳐 나는 기호 정보를 바탕으로
분노도 슬픔도 섞이지 않은 약삭빠른 얼굴로
세상을 냉정하고 재빠르게 분석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
외부 세계와 맺는 유기적 관계를 피하고
자본이나 국가의 외교를 통해
어딘지 모르게 무기적으로 접하는 것,
사실대로 말하면 타자와 맺는 관계를
철저히 회피하는 상태를 이 나라에서는
안심과 평온이라고 말하며
안태라고 부른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나라 전체가 대인 기피증을 앓고,
투명한 향균 벽으로 격리되지 않으면
주변 세계와 도저히 함께하지 못하는
병에 빠져 있는 것이다.
(350쪽)


작가는 기자로서 대상을 객관화하면서

오만함에 익숙해졌고,

신체성을 회복하고 싶어 ‘먹는 인간’이 되었다.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지적했듯,

기자로서 세상의 고통을 목격해도 "관음증적인 향락"과

값싼 연민으로 "세계를 선명하게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세상이란 식탁에서 현재를 음미한다.


다시 돌아가,

나의 식탁엔 타자가 없었다.

동시대로부터 멸균해 순간만 있는 즉석 식품을 먹고 있었다.


맛있는 걸 먹고, 사진을 찍는 걸 반성하는 게 아니다.


SNS 인증샷을 찍고 밥을 먹는 일,

빈민촌의 환자가 식사를 입에 넣는 일,

위안부 피해자가 끌려가던 배에서 떡을 베어무는 일.

그 모든 먹는 행위는 삶의 의지와 등치된다.


오늘 먹음으로 내일을 살고자 했던 삶들을

인간적으로, 먹는 인간적으로, 모두 같은 인간적으로,

체화하고 있어야 함을 소환하는 것이다.


책을 덮었을 즈음 이스라엘 우익 활동가들이 가자지구로 향하던 쌀, 밀가루, 설탕 등 구호품을 짓밟았단 뉴스를 보았다. 마구 점프하며 구호품을 짓이기던 아이들도 있었다.


삶이, 인간이 짓밟히고 있다.

<먹는 인간>의 이야기는 2024년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