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이 연말이라고 영국 국기를 내건 식당에서 다섯 가지 요리를 시켰다. 처음은 맛있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는 낯빛이 오가더니 마지막엔 왜 피클과 김치가 없느냐로 의견이 모아졌다. 같이 나온 샐러드만 먹었으니 푸성귀가 귀해 시래깃국이 생각나고 시큼한 것들이 생각났다. 단무지라도 나왔으면 괜찮지 않았을까.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수제비를 시켜 먹었는데 단무지가 나오지 않았다고 그이는 아쉬워한다. 자기는 단무지를 좋아한다고. 궁금했다. 왜 단무지를 좋아하는지 물었더니 어렸을 때 자주 가던 중화요리 집에서 자장면을 먹으면 나오던 단무지가 생각이 난다고. 나도 단무지를 좋아한다고 동지를 만난 양 반긴다.
가을 무 밭에는 누가 오나 안 오나 바라보는 미어캣 경비처럼 키를 껑충 세우고 귀를 기울이는 것만 같은 무. 무 다리 무처럼 오동통 하지 않은 길쭉하고 키다리 아저씨처럼 멀대 같은 무가 있었다. 그 무를 뽑아다 그늘에서 시들 거리게 두던 엄마가 늦은 가을날 볕이 좋은 곳에서 겨와 소금, 치자가루 사카린을 버무렸다. 동이에 겨한 켜, 무 한 켜 층층이 가득 쌓아 맨 위에는 볕 짚으로 마감을 하였다. 그렇게 뒤뜰에 잘 두고 잊어버린다. 서너 달의 시간 동안 간이 배이고 알맞게 삭아서 단무지로 완성이 되어갔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그때부터 밥상에 단무지가 올라왔다. 그냥 오르지 않고 갖은양념을 다하여 떡하니 반찬다운 면모를 가지고 한자리 차지했다. 도시락에도 빠지지 않고 단골 찬이 되었었는데. 초등학교 때만 단무지를 담았던 것 같고 중학교 대부터는 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공장 식 단무지가 나왔을까.
다꾸앙을 줄여 다깡이라고 불렀다. 일제 강점기에부터 있던 음식이니까 그렇게 불려졌을 것이다. 어른들이 부른 대로 부르던 다깡이 단무지로 변하여 간 것은 언제부터였는지 잘 모르겠다. 단무지가 반찬에 끼이지 못하고 김밥집이나 자장면 먹을 때 곁 들이로 나오기에 마주칠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샛노란 단무지를 마주칠 일이 있으면 반가워서 억지로 다 먹고 있는 나를 본다. 미련하기도 한 것 같다. 화학 첨가물이 많이 들어갔다고 요즈음 사람들은 기피 음식으로 멀리하는데. 나와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단무지를 보면 추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일흔이 넘은 그이는 어렸을 때 자주 간 중화요리 집에서의 자장면 때문에 아직도 단무지를 좋아한다. 같이 갔던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스며있는지도. 그 순간에 나눴던 정겨운 이야기와 웃음과 표정이 단무지를 통해서 그리움으로 살아나는 것은 아닌지.
나는 요양원에 있는 엄마가 늦은 가을날 동이를 씻고 준비한 노르스름한 쌀겨와 색 고운 치자가루와 물기를 잃어버려 흰색을 버린 무를 씻어 담던 날이 떠올라 마음을 기울인다. 젊었던 엄마의 한때가 따사롭던 햇살 속에서 움직인다. 기다란 무와 치자의 붉은 빛깔이 새겨져 아롱 인다. 이야기 소리도 들려오고 웃음도 피어난다. 몇 개월의 시간 동안 항아리에서 숙성이 되어 맛있는 반찬으로 변하여 오르던 단무지는 추억이다.
지금은 아주 샛노란 물감을 입혀 화려한 단무지다. 내 어렸을 때만 해도 노르스름한 단무지에 고춧가루 깨소금 참기름으로 조물조물하여 내어놓으면 때깔이 고왔는데. 그러고 보면 그때 단무지는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어떤 집에서는 아예 색을 입히지 않아서 희끄무레한 단무지를 그냥 먹었다. 보기엔 맛이 없어 보여서 어린 맘에 흉을 보았었는데 나름 맛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담아 먹는 동치미에 아무 색을 들이지 않아도 시원하고 맛있는 것처럼 색이 없어도 무가 가지고 있는 담백함과 시원함이 단맛으로 우러났을 것이다.
기회가 되면 엄마가 담던 단무지를 한 번 담아보고 싶어 진다. 키다리 아저씨 같은 무씨를 심고 가꾸어 꾸들 하게 말리고 미강이라고 부르는 쌀겨를 준비하고 치자열매를 부수어 색을 낸다. 뉴슈가와 소금으로 간을 하여 한겨울 내내 숙성한 단무지를 담고 싶은 마음이 다. 엄마 대에서 끊어진 일들이 어느 때는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위 사진은 다음까페 지수, 혜수아빠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