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님께서 서울 가시는 길 동대구역에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다. 어딜 가든 놀이로 바꾸는 능력을 가진 나는 시부모님을 모셔다 드리러 가면서 집에 있는 백화점 상품권을 탈탈 털어 지갑에 넣었다. 올해 휴직을 하면서 쇼핑을 참겠다고 다짐했지만 가방이 하나 필요하다고 노래를 부르던 중이었다.
어머님께서 고맙다고 수고한다고 워낙 인사를 하셔서 동대구역에 시부모님을 내려드리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신세계 백화점 주차장으로 바로 차를 넣지 못하고 한 바퀴 돌았다. ㅎㅎ
오랜만에 쇼핑이라 들떴다.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는데 버튼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불이 들어오는 버튼을 눌러 내리니 영화관이다. 백화점으로 통하는 곳은 천으로 막혀 있네. 영화관 데스크에 가서 백화점 휴무일인지 물었더니, 아직 오픈 시간이 되지 않았단다. 감을 잃었어. 백화점에 너무 오랜만에 왔구먼.
영화관 로비에 앉아 한참이나 책을 읽고쇼핑을 시작한다. 나는 쇼핑을 좋아한다. 옷도 좋아하고 구경하는 것도 좋아한다. 사고 싶은 게 자주 생기기 때문에 비싼 것은 사지 않는다. 사려 하지 않은 것들까지 죄다 둘러보기 때문에 혼자 쇼핑하는 것을 즐긴다. 아무리 많이 걸어 다니더라도 내 다리 눈치는 안 봐도 되니까.
백화점에 들어서자마자 가성비 좋은 매장에서 마음에 드는 가방을 찾아내 찍어두고, 청바지 3개를 입어본 후 그중 하나를 골라 샀다. 가방 매장을 다 둘러봐도 비쌀 뿐 그전에 찍어둔 것보다 더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찍어둔 가방을 사러 가기 전에 다른 매장을 둘러보다 가죽재킷도 하나 사고 아이들 줄 간식까지 골랐다.
짧은 시간 안에 두 손에 쇼핑백이 묵직하다.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내 쇼핑 실력 죽지 않았다며 어깨가으쓱하다. 공차를 한 잔 시켜놓고 그림을 그리며, 문득 내가 뿌듯해하는 내 쇼핑 실력의 실체를 깨닫고 폭소가 터진다.
'빠른 시간 안에 내 맘에 쏙 드는 것을 꼭꼭 집어낸다'는 내 쇼핑 경험을 돌아보니, 내 맘에 쏙 드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결론에 이른다. 함께 쇼핑해 본 바로 우리 엄마는 150프로가 마음에 들어야 물건을 산다. 그에 반해 나는 70프로가 마음에 들면 물건을 사고, 사자마자 내 것이라는 애착으로 모자라는 30프로를 채워버린다.
오스틴 쇼핑가를 걷다가 무심코 들어가 신어보고는 내가 찾던 거라며 입이 찢어지도록 좋아하며 샀던 부츠는 옆에 지퍼가 없어 신고 벗기가 불편했다. 그 사실을 사기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너무 예뻐서 그 정도는 괜찮다며 겨울마다 불편함을 감수하며 애정 듬뿍 담아 신고 다닌다.
로마쇼핑거리에서 들어간 지 10분 만에 쇼핑백에 담아 나온 트렌치코트는 길이가 길지만 내가 꼭 좋아하는 색깔이라며,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 없다며 1분의 고민도 없이 사 왔다. 그 이후 피렌체에서 찰떡이라며 잘 입고 다니고, 한국에 가지고 와서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트렌치코트가 되었다.
핏이 딱 내가 찾던 거라며 오늘 산 청바지는 배가 타이트해서 밥을 많이 먹은 날은 입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내 체형에 이 핏의 청바지는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정도면 운명적 만남이라며 데려왔다.
내가 자랑스러워하던 쇼핑 실력의 실체가사실은 대단한 나의 안목이 아니라 까다롭지 않은 내 성격이었을 뿐이라니. 폭소가 터지지 않을 수 없다. 난 크게 욕심이 없는 사람인 거 같다. 늘 이 정도면 괜찮다고 느낀다. 비싼 물건을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지불할 값에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만족해 버리는 것이다. 절대로 더 비싼 물건들과 내가 산 물건들을 비교하지 않는다. 내가 고른 이상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마음 편한 삶의 방식이다.
돌아보니 큰 고민 없이 샀기 때문에 후회를 했던 적도 있다. 그 상황에서도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고 다른 옷들에 대충 어울리게 코디를 하고 나면 또다시 나의 코디 실력을 칭찬하며 나의 실수를 무마한다. 큰 고민하는 만큼의 스트레스를 줄였으니 그것도 괜찮은 일이라 생각한다.
얼렁뚱땅하는 성격을 가진 내게 내가 적응한 방법이다. 나를 데리고 살기에는 이 방법이 적합하더라, 이런 식의 합리화. 내가 생각해도 난 참 세상 편하게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