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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yfulmito Nov 18. 2023

여행은 날씨가 팔 할이라지

평소에 등산은 지지리도 싫어하면서 늘 '한라산 등반'이 버킷리스트에 들어가 있었다. 아이들이 적당히 자라고 내가 너무 나이 들기 전 한라산을 올라가야 한다며 언제나 적당한 시기를 재곤 했다.


엄마의 '한라산 등반'타령에 아들은 늘 함께 하겠다, 했고 딸아이는 늘 나는 안 가,를 외쳤다. 그리하여 나의 휴직기간, 아들이 중학생이 된 올해, 날씨 좋은 가을을 노렸다. 그렇게 하여 아들과 단 둘이 제주 여행을 준비하려던 차, 갑자기 딸아이가 자신도 한라산을 오르겠노라, 선언한다. 갑자기? 왜? 오르막이라면 질색팔색하면서?


아무튼 큰 맘을 제대로 먹은 딸아이를 빼놓을 수 없어서 중3 딸의 기말고사가 끝나는 시기, 시험 점수 확인이 끝나는 시기에 비행기표 3장을 예매하고 한라산 등반 예약을 마쳤다. 바쁘다던 남편이 자신도 하루 정도는 월차를 쓰고 같이 가겠다며 뒤늦게 비행기표를 구매하고 한라산 예약까지 마쳤다.


그때부터 남편의 한라산 등반에 대한 만반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갖가지 후기를 읽고 등산스틱, 등산화 렌털을 신청하고 날씨 변동에 따라 아이젠 렌털까지 마쳤다. 우비와 핫팩 등을 준비하고 레깅스, 여분의 양말, 장갑, 모자, 목워머, 보온병 등 짐도 꼼꼼하게 챙겼다. 제주에서 사야 할 간식거리도 꼼꼼하게 기록하고 남편이 제주에 오기 전 아이들과 마트에 가서 물, 컵라면, 초콜릿, 에너지바, 소시지 등을 잔뜩 샀다. 평소 신던 운동화 신고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아들 데리고 한라산을 올라가려던 대책 없는 나는 남편 덕분에 만반의, 만반의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날씨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갈 수 있다는 독도 여행을 성공리에 마쳤으나 우리의 제주 여행날짜에는 '비예보'의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일기예보가 틀린 날이 워낙 많으니 일기예보가 틀려주길 바라며 한라산 등반을 차질 없이 준비했다.


한라산 등반을 계획한 전 날, 화창한 하늘을 보며 아침 일찍 제주에 도착했다. 한라산 등반을 앞두고 있기에 특별한 일정은 없다. 귤체험이나 하고 하루종일 잘 먹고 쉬고 마트나 다녀올 계획이다. 하지만 아침을 먹고 나오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비가 많이 오는 건 아니지만 귤을 따는 중에 비가 많이 올 수도 있으니 해안도로 드라이브하며 카페로 갔다. 정원이 예쁜 키페에 갔지만 음료를 먹는 사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예쁜 정원은 걸어보지도 못하고 나와야 했다.


제주까지 왔는데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하기는 아쉬워 미술관을 향했다. 비는 오락가락, 빗방울이 잦아들다가 다시 쏟아지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미술관에 주차를 했을 때는 하늘에 구멍이 난 듯 쏟아진다. 주차장과 미술관 입구는 100미터 남짓하지만, 이 비를 뚫어서라도 꼭 미술관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얼추 숙소 체크인 시간도 다가오고 있고 다음날 한라산 일정을 위해 그냥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새벽 비행기를 타느라 잠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한 것 없지만 피곤하던 차였다.


숙소에 들어와 짐을 풀고 한숨 자고 쉬다가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퇴근하고 제주로 날아온 남편을 데리러 공항으로 갔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남편은 역대급 롤러코스터 비행기를 타고 왔다며 무용담을 펼친다. 저녁을 배 두둑하게 먹고 등산용품 렌털샵으로 향한다. 48시간 이전에 취소하면 무료 환불이지만 이미 늦었다. 내일 날씨가 좋지 않더라도 렌털용품을 일단 빌리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오전 5시에서 10시까지 계속 입산통제가 되는 경우에는 무료 환불을 받을 수 있지만, 통제까지 되지 않는 경우라면 날씨가 안 좋더라도 렌털까지 한 상황에 올라가지 않을 수가 없다.


밤새도록 엄청난 비바람이 창을 흔든다. 천둥과 번개는 덤이다. 새벽 5시 50분 알람소리에 눈을 뜨고, 입산통제 메시지를 확인한다. 아~ 허무. 그 와중에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렌털비용 아까워서 무리하게 산에 올라갔다가 비바람에 생고생을 하게 될까, 사실 그게 더 걱정이었다. 가족들의 아쉬움과 허무하다는 말들 속에 홀로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한라산 등산 핑계 대고 제주도 올 일이 또 생겼으니 잘 됐다는 생각까지 해 버린다.


하루 일정이 완전히 비었다. 평소 가고 싶어 표시해 두었던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이라는 유민 아르누보 뮤지엄과 보롬왓이 떠오른다. 나가서 브런치 먹고 렌털용품 반납한 후 어제 못한 귤체험을 하고 유민 뮤지엄에 가기로 했다. 입산은 금지되었지만 다행히 날씨는 좋다. 아니 좋았다.


쨍한 날씨에 사진빨 잘 받는다고 신나 하며 귤을 따다 보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서둘러 버킷을 채우고 실내로 들어오자마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바람도 물론. 이건 11월에 보던 날씨는 분명 아니야. 7월 장마철에 여행 왔다가 만났던 그때 그 날씨다. 11월인데 말이지. 비가 그치기를 한참이나 기다리다 비가 조금 잦아들었을 때 주차장까지 뛰기 시작했다. 하, 꽤 멀다. 헥헥거리며 차에 탔는데 누군가 한 마디 내뱉는다. "아, 재밌어." 그 한 마디에 불평이 쑥 들어간다.


섭지코지에 있는 유민 뮤지엄은 주차장에서 거리가 멀다. 셔틀을 기다려서 타고 들어가야 할 정도다. 이 날씨엔 안 된다. 예약한 표를 취소한다. 김영갑 갤러리에 가기로 했다. 가는 내내 억수같이 비가 쏟아진다. 아들이 잠도 들었기에 차에서 좀 더 기다리다 보니 비가 그친다. 지금이다, 지금 들어가자. 작은 갤러리를 보고 나오는 사이 또 비가 쏟아진다. 작은 정원 구경도 못하고 다시 차에 탄다. 아~ 약 올라. 이렇게 비가 오면 보롬왓도 가나 마나


해변에 차 세우고 비 오는 제주 바다 구경 하다가  밥이나 먹으러 간다. 그 사이에는 또 천둥, 번개에 우박까지 쏟아진다. 정말 제주 날씨 버라이어티하군.  이번 제주 여행은 날씨 덕분에 제대로 놀멍쉬멍이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는 또 처음일세. 아무것도 안 하고도 이렇게 피곤하다니.


밤새 창문이 떨어져 나가도록 비바람이 불어댄다. 아침에 비행기나 제대로 뜰지가 걱정스럽고, 역시나 비행기는 1시간이나 지연됐다. 여행은 날씨가 팔 할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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