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방어기제
“안 가져가요!”
시부모님께서는 매해 연말이면 교회에서 나눠주는 벽걸이 달력을 부러 챙겨주신다. 번번이 사양의 뜻을 전하느라 난감하다. 최근에는 사은품으로 예쁜 벽걸이 시계를 받았다고 건네주셨다. 나는 집에 가지고 오기 싫었지만 남편은 거절하기가 죄송스러웠던지 가져가겠다고 챙겨 와서는 그의 책상 위에 고이 올려두었다. 시부모님의 표정에 어렴풋한 승리의 미소가 엿보였다.
우리 집의 인테리어 콘셉트는 ‘비워두기’다. 벽에는 되도록 아무것도 걸거나 붙이지 않는다. 그 흔한 달력이나 시계는 물론이고 액자도 없다. (결혼 액자는 걸지 않을 걸 알기에 아예 만들지도 않았다.) 아, 벽걸이 TV와 에어컨은 예외다.
벽을 포함해 집안 모든 곳에 최대한의 여백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나와 달리 남편은 여백을 깨고 싶어 한다. 작년에는 커피머신을 사고 싶다고 했고 최근엔 코어 근육을 단련하겠다며 로잉머신을 사도 되냐고 물어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용히 A4용지와 펜을 들고 나와 무엇이 더 비용 효율적인지 가스라이팅을 시작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설득당하는 것뿐이다. 답은 내가 정해. 너는 그냥 대답만 해.
내가 그토록 비워두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온갖 정보를 본능적으로 채집하느라 피곤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집안에서만큼은 최소한으로 자극을 억제하려고 한다. 쉼을 방해하는 요소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요즘 참여하고 있는 글쓰기 수업에서 '여백의 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백에 대해 생각했다. 집안은 그토록 여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글은 어떻게 쓰고 있었던지. 그동안 써 온 글들을 다시 뒤적여봤다. 왠지 종종 대는 모습이 꼭 나와 닮아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고 설명하고 싶은 것들도 너무 많다.
집을 그렇게나 비우려는 강박은 여백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온 내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방어기제였는지도 모르겠다. 물건을 비운다고 마음이 비워지는 것도 아니고 물건을 채운다고 여유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오늘 남편이 돌아오면 로잉머신을 아직도 사고 싶은지 다시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