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은 가능한 가볍게
무료한 저녁, 채널을 돌리다 여행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멈췄다. 여행의 주인공은 기안84(이하 기안). 그는 솔직히 평소에 별로 좋아하지 않던 연예인이었다. 이번 여행지는 다름 아닌 인도. 그 유명한 인도에 기안이라니,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공항으로 나서는 기안의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거짓말을 조금 더 보태면 너무 놀라서 턱이 빠질 것 같이 입이 벌어졌다. 그의 충격적인 행보에 넋이 나간 것이었다. 인도 여행을 가는데 캐리어가 없다니. 캐리어만 없는 게 아니라 백팩도 없다니. 아니, 저렇게 여행을 떠난다고? 마치 밤늦게 옆집 사는 친구 집에 마실 가는 가벼운 행색으로 인도 여행길에 나선 것이었다.
여행을 떠날 때 짐을 챙기는 스타일을 보면 대충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혹시 나를 생각 해서 그대로 가져올 것이 거의 확실시돼 보이는 것들, 예를 들어 상비약이나 피부관리 제품들, 까지 챙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기안처럼 빨려고 세탁기에 던져둔(아직 빨지 않은) 옷을 세탁기에서 다시 꺼내와 가방에 쑤셔 넣는 사람도 있다.
또 여행을 갈 때 무엇을 꼭 챙겨가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와 같은 가치관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옷은 최대한 가볍고 편하게 챙기는 편이지만 책이나 노트는 꼭 담아가는 편이다. 남편의 경우 일을 손에서 놓을 수 없기에 아이패드는 기본 장착이다.
그런데 기안은 짐을 챙기는 스타일을 분석할 수 있을 만큼의 짐을 싸지도 않았고 무엇을 꼭 챙겨가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뭔가를 소중히 챙기지도 않았다. 데이터가 전무하다. 학습되지 않은 상황. 버퍼링이 돌았다.
“완전 멋있어.”
나도 모르게 뱉어낸 감탄과 함께, 그 순간 나는 그의 팬이 되기로 했다.
다음 날 친구들과 경주 여행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원래도 짐을 가득 싸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엔 그걸로 모자랐다. 정말 가볍게 가야지. 여행은 기안처럼. 인도도 저렇게 떠나는데 내가 무겁게 짐을 쌀 필요는 없지.
빼고 빼 배낭을 삼분의 일 채웠다. 최선이었다. 그런데 인도로 떠나는 기안보다 짐이 많아 보였다. 왠지 진 기분이었다.
캐리어를 가득 채워 떠나든 맨몸으로 떠나든 여행은 여행이다. 순례길이 아닌 이상 짐은 숙소에 넣어두면 그만이다. 그래도 왠지 이제 여행은 기안처럼 하고 싶어졌다. 지나치게 계획하지 않고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고 지나치게 치장하지 않고 지나치게 무겁지 않게. 인생도 기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