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하늘나라에서 평안히쉬세요
오남매가 모두 상경한 뒤 외할머니는 홀로 경상남도 진주의 시골집을 지키셨다. 그러던 어느 날 뇌출혈로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행히 시골 옆집에 살고 계시던 큰집 친척분 덕에 바로 응급처치가 취해졌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때도 엄마는 한참을 울었다.
퇴원 후 오랜 재활의 여정이 시작됐다. 엄마는 둘째 딸이었고 아들도 둘이나 있었지만 할머니는 둘째 딸네 집으로 오셨다. 안방은 할머니 방이 되었다. 할머니는 한동안 꼼짝을 못 하고 누워계셨다. 엄마는 늘 할머니의 곁을 지켰다.
시일이 지나 조금씩 거동을 시작하시게 됐다. 하지만 한쪽 수족을 편히 움직이실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운동만이 답이라고 했다. 하지만 환자의 몸은 마음만큼이나 무거울 뿐이었다. 엄마의 잔소리가 심해졌다. 다행히 그만큼 할머니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일 년이 되어갈 즈음 십여 분 거리의 공원까지 혼자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셨다. 노인정도 가끔 나가셨다. 늘 자세가 반듯하시고 중절모를 쓰시던 친구도 생기셨다. 그렇게 30년 전, 우리는 다시 건강한 모습의 할머니를 되찾았다.
큰외삼촌이 결혼을 하면서 할머니를 모시겠다고 했다. 그렇게 할머니는 삼촌 집으로 옮겨 가셨다. 그곳에서 두 명의 손주를 연달아 키워내셨다. 소문으로는 큰손자가의 발이 땅에 닿지도 못하게 늘 업고 다니셨다고 한다.
손주들이 어느 정도 크고 난 뒤 할머니는 우리 집에 자주 지내다 가시기 시작했다. 가끔은 강원도에 살고 있는 큰 이모 댁에 다녀오시기도 했다. 엄마는 우리 집에 할머니를 모시고 싶어 했지만 현실은 여의치 않았다. 할머니가 오실 때마다 아빠는 막걸리를 한 병 사 오셨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가끔 노래를 흥얼거리시기도 어깨춤을 추기도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집에서 더 이상 모실 수 없어 요양원으로 모시자는 얘기가 오고 갔다. 할머니를 모시고 살아본 적 없던 자손들은 하나같이 이를 완강히 반대했다. 하지만 그런 누구도 자신이 모시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할 자격이 없었다.
몇 번의 가족회의 끝에 외할머니는 큰외삼촌과 우리 집의 중간즘 위치한 요양원으로 모셔졌다. 할머니는 처음에는 표정이 좋지 않으셨다. 하지만 다행히 점점 편해지셨다. 우리는 그곳에서 명절을 맞았고 할머니의 생일을 함께 축하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흘러 팔여 년의 시간이 지나갔고 23년 추석, 보고싶던 아들, 딸들을 모두 만난 뒤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장례식장을 떠나 화장터로 가는 길, 할머니를 모신 리무진은 요양원 건물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할머니는 요양원에 들어가시고 난 뒤 그 밖을 몇 번 밖에 나오시지 못했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곳을 둘러보셨으리라.
그날도 엄마는 한참을 울었다.
가만히 고구마줄기를 가득 졸인 짭조름한 된장찌개 맛을 기억해 본다. 버리는 휴지도 그냥 구겨 버리지 않고 네모나게 끝을 모아 얌전히 접으시던 모습을 떠올려본다. 내려가던 언덕길을 다시 급하게 올라와 바지춤에서 꺼내 손에 쥐어주신 세 번 접은 지폐를 그려본다.
손사래를 치는 나에게 옅은 웃음을 지으며 급히 돌아 걸음을 재촉하시던 몸뻬바지 입은 그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