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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 테라피스트 R Nov 11. 2019

허무, 허무 그리고 허무

어니스트 헤밍웨이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by 문학평론가 신형철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장편이 속속 재출간되고 있지만, 사실 내가 더 고대한 것은 그의 단편들이 유려하게 다시 번역되는 것이었다. 헤럴드 블룸은 <헤럴드 블룸의 독서 기술>(을유문화사, 2011)에서 현대 단편 소설이 두 개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체호프-헤밍웨이’ 양식과 ‘카프카-보르헤스’ 양식. 불멸의 단편 작가 체호프와 붙임표로 이어진 이름은 왜 헤밍웨이어야 할까. (모두 또래이자 역시나 눈부신 단편의 생산자들인) 피츠제럴드나 나보코프보다 헤밍웨이가 더 위대하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만큼 헤밍웨이의 단편이 (체호프의 그것이 그러한 것처럼) 강력한 양식적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뜻일까. 

우리가 블룸의 견해에 찬동하거나 반박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학 도서관에 꽂힌 옛 번역본 말고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헤밍웨이 단편집은 고작 한두 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영어판 단편전집에는 70여 편의 중단편이 수록돼 있는데, 이 중 영어권 앤솔러지에 단골로 호출되는 대표작은 <킬리만자로의 눈>, <하얀 코끼리 같은 산>, <살인자들>, <깨끗하고 환한 곳> 같은 것들이다. 최근 출간된 <노인과 바다>(이종인 옮김, 열린책들, 2012)에 이 대표작들이 알차게 수록돼 나온 터라 이참에, 내게 특별히 각별한, 거명한 것들 중 마지막 작품에 대해 말하려 한다.

늦은 밤, 손님이 모두 떠나간 카페에서, 귀가 들리지 않는 한 노인이 홀로 술을 마시고 있다. 젊은 웨이터와 중년 웨이터가 함께 노인을 주시한다. 지난주에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노인이라던가. 젊은이는 자신의 퇴근을 지연시키는 노이닝 마뜩찮아 투덜댄다. “지난주에 자살에 성공했으면 좋았을 텐데.”(p236) 그러나 중년 웨이터는 젊은 동료를 부드럽게 나무라며 그와는 다른 태도를 취한다. “나는 카페에 밤늦게까지 머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편이야.”(p240) 이윽고 노인은 떠나고 젊은이는 서둘러 퇴근한다.


중년의 사내는 홀롤 카페를 정리하며 자신과의 대화를 계속한다. 그는 노인의 기분을 알 것 같아.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것은 공포도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건 그가 너무도 잘 아는 허무였다. 모든 것이 허무였고 인간 또한 허무였다. 바로 그 때문에 빛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또 약간의 깨끗함과 질서가 필요한 것이다.”(p241) 이 소설의 제목인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A Clean, Well-Lighted Place)’이 여기에서 나왔다. 삶의 허무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장소, 노인이 밤마다 떠나지 못하는 그 카페 같은 곳. 


이어 중년의 사내는 특별한 주기도문을 외운다. 성스러운 단어들이 자리에 모두 스페인어 ‘nada’(허무)를 집어넣은 이상한 주기도문을. 그리고 성모송(聖母頌)의 첫 부분에 ‘nothing’을 채워 넣은 문장을 그 주기도문의 끝에 붙여 자신만의 기도를 완성한다. (역사는 ‘nada’를 음역하여 “나다에 계신 나다, 그대의 이름은 나다”와 같은 식으로 옮겼고 이는 존중한 만한 선택이지만, 나는 그냥 ‘허무’라고 번역해서 직접성을 높이는 쪽을 택하겠다. 그래야 더 신랄하게 쓸쓸해진다.) 이 대목이 백미다.


“하늘에 계신 우리 허무님, 당신의 이름으로 허무해지시고, 당신의 왕국이 허무하소서. 하늘에서 허무하셨던 것과 같이 땅에서도 허무하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허무를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허무한 것 같이 우리의 허무를 허무하게 해주소서. 우리를 허무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허무에서 구하소서. 허무로 가득한 허무를 찬미하라, 허무가 그대와 함께 하리니.”


기도를 마친 사내는 자신의 카페 안에 있는 바에 앉아서 술 한 잔을 마시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집으로 옮긴다. 불과 여덟 쪽이 안 되는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이 소설의 착잡한 여운은 여전히 그 카페에 남는다. 



“허무 그리고 허무 그리고 허무(nada pues nada pues nada).” 이런 기분에 사로잡혀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행여 아직 없다하더라도, 언젠가 세월이 흘러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에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다가 우리는 문득 깨닫게 될지 모른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 언젠가 내가 읽은 적 있는 살밍라는 것을. 다음은 제임스 조이스의 말이다. 


“헤밍웨이는 문학과 삶 사이의 장막을 축소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작가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일이죠.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이라는 작품을 보셨습니까? 장인의 솜씨에요. 정말이지 이것은 지금까지 쓰인 이야기 중에서 최고의 것 중 하나입니다.(아서 파워, <제임스 조이스와의 대화>,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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