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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 테라피스트 R Nov 18. 2019

‘고통’이 ‘힘’이 되기 위해 필요한 주문

고통의 힘


올해 초, 독서 낭독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독서를 좋아했고, 낭독도 즐겨했는데 두 가지 일로 봉사를 할 수 있다고 하니, 호기심도 생겼고 반가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을 만날지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첫 날을 맞이했습니다. 봉사를 주관하는 곳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비영리 단체였습니다. 제 이름을 적고 나니 작은 방으로 안내해 주셨습니다. 낭독시간은 2시간이었습니다. 지나간 봉사자분들의 이력을 보니 대학생부터 50-60대 성인까지 다양했습니다. 책은 원하시는 책으로 골라져 있었습니다. 제 손에 쥐어진 책은 <나미야 잡화점>이었습니다. 한 때 베스트셀러이기도 했고 영화로도 상영되었지만 꼼꼼히 일독을 한 적은 없었던 책이었습니다. 또 글밥이 워낙 있는 책이라 과연 낭독하면서 한 권을 다 소화할 수 있을까, 싶은 걱정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한편 반갑기도 했던 것이, 낭독을 하면서 저 또한 책을 같이 읽어볼 수 있겠다,라는 기대감도 생기더군요.



이내 시간이 다 되자 문이 열리면서 80세가 다 되신 아리따우신 한 어머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당시가 그래도 제법 쌀쌀한 날씨의 초봄이었는데도 화사한 주황빛의 코트와 흰 색 목도리를 멋스럽게 두르신 참 고운 어머님이셨습니다. 일찍 집을 나서면서 청바지에 티셔츠를 대충 걸치고 간, 의복을 갖추지 못한 제가 살짝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너무 고우시다며 인사를 건네고 짧은 서로의 소개를 나눈 후 낭독을 시작했습니다. 

<나미야 잡화점>은 큰 소설의 틀 안에 짧은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 액자식 소설입니다. 내용도 흥미롭고,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담고 있는 메시지도 의미가 있어 낭독 2시간은 금세 흘러갔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참 재밌게 들으셨다며 환하게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게 되셨어요?”라고 여쭙자, “응. 실은 작년까지는 남편이 나를 데려다주고 기다렸다 같이 가곤 했지. 백내장이 오면서 내 눈이 서서히 나빠졌었거든. 그래도 남편이 워낙 자상해서 생활하는데 큰 불편함은 못느꼈었지. 그런데 작년 말에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어. 워낙 자상했던 사람이고 항상 둘이 잘 다녔었는데. 남편의 빈자리를 생각할 때마다 하늘이 무너질 듯 가슴이 아리고 아픈거야. 그래서 정말 많이 울었지. 매일같이 말야. 그랬더니 나빴던 시력이 더 떨어져서 희미하게 보였던 것들도 이젠 거의 안보여. 의사한테 찾아가보니, 너무 많이 울어서 시력이 더 떨어진거래. 

요즘은 다시 기력을 좀 회복해서 여기저기 다니고 있어. 이곳엔 큰 아들이나 며느리가 데려다 주곤 해. 가끔은 혼자서 오기도 하지. 혼자 올 때는 넘어지기도 해. 작은 돌부리 같은 데 걸려서. 이젠 익숙해질만도 한데 말이야. 그래도 집에 있는 것보다 이렇게 나와서 책도 읽고, 오후에 있는 강의도 듣고 집에 가면 하루가 참 보람있고 좋아. 물론 집에 가면 또다시 외로움이 몰려와. 남편 생각에 눈물도 나고. 하지만 그래도 감사해. 남편 덕분에 이렇게 좋은 곳도 미리 알게 되어서 내가 좋아하는 책들도 실컷 들을 수 있으니 말이야.”



오렌지 빛깔의 화사한 코트가 잘 어울리는 어머님은 눈물을 글썽이시며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참, 인생이 희한하더라구. 가족들도 그렇고 본다는 것도 그렇고. 그런 것이 일상이었을 때는 오히려 모든 것을 당연한 듯 생각했지. 그런데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고 시력도 잃게 되니, 이제는 당연히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어떤 것 하나도 소홀하게 여겨지지 않더라구. 시력을 잃고나서 그래도 다행인 건 같은 상황에 있는 분들과 모임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거야.  함께 여행도 다니며 좋은 강연 있으면 찾아가서 듣기도 해. 또 책읽기를 참 좋아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들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클래식 음악도 즐겨들어. 하나하나의 선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 그래서 생각하곤 하지. 고통 뒤엔 또다른 소망이 나를 찾아오는구나,라고. 내가 모든 걸 다 누렸다면 이런 작은 것에도 감사하지 못했을 거야.”


이후 그 어머님과는 오랜 동안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아픔을 겪으셨지만 다행히 아버님의 성정을 닮은 자상한 아드님 내외분과 좋은 모습으로 지내는 과정을 지켜보기도 하였습니다. 가을 무렵부터는 사정이 생기셔서 뵙지는 못하였지만, 그 어머님을 뵈면서 저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 때로는 ‘고통이 힘이 될 수도 있겠다’라는 깨달음을 배웠습니다.     



누구든 고통 없는 평탄한 삶을 원합니다. 굴곡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복 받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생의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는 것들은 대부분 고통으로부터 피어납니다. 예를 들어 “교만, 자만, 불통”과 “겸손, 배려, 감사” 중에 소중한 가치로 여겨지는 것들을 전자가 아닌 후자입니다. 이와 같은 가치는 아무 조건 없이 불쑥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사람은 고통을 통해 분명 성장합니다.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뀝니다. 내가 누리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작은 예이지만, 올해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떠나가신 후 한동안 슬픔에 잠겨 있던 제게 가장 큰 위로를 주었던 친구는, 오래 전 자신의 아버지를 떠나보냈던 친구였습니다. 부모님을 잃은 슬픔 앞에 같이 울 수 있었고 같이 아파할 수 있었습니다. 또 암으로 오랜 투병 생활을 하고 계시는 어르신들을 뵈면 그 상실감과 아픔을 이해하기에 더욱 잘해드리고 싶습니다. 공감의 폭이 더 넓어졌습니다. 


고통이 개인적인 성장과 훈련에 변화를 불러오지만 그렇다고 시련을 자신을 계발하는 방법쯤으로 인식해선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시각은 고통을 즐기는 일종의 마조히즘(masochism)에 가까울 수도 있으니까요. 심신이 괴로워야 비로소 고결하다는 느낌을 주는 고통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고통에는 스스로에게 몰두하게 만드는 성향이 있습니다. 단순히 고통을 자신과 자신의 성장을 위한 수단인 듯 여기며 집착한다면 그러한 역경은 정말로 우리 목을 조르는 올무가 될 것입니다. 


고통이 인생을 살아가는 ‘힘’이 되려면, 고통이 왔을 때 그동안 나에게만 향해왔던 시선을 이제는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겠습니다.     




강상중의 저서 <고민하는 힘>에서는 어려운 현 시대를 잘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로, 결국 ‘자기중심주의’를 벗어나 ‘타인과의 관계로 내던져지는 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연관되는 ‘자아’는 자기 속에만 갇혀 자기만 생각하는 ‘자기중심주의’와는 다릅니다. 근대 철학에서 ‘자아’는 다른 사람과의 구별이나 대립 등 ‘타자’의 존재를 바탕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개인주의의 시대인 근대 이후 비대해진 자아는 사회의 해체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자아는 타자와의 ‘상호 인정’에 의한 산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타자에 대해 던질 필요가 있다는 점입니다. 나는 타자와 상호 인정을 하지 않는 일방적인 자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확실하게 말하면 타자를 배제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41)    




그리고 끊임없이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진정으로 더욱 단단한 자아를 만드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 힘은 곧 '청춘'이라 부를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저자가 말하기를,  청춘은 비단 인생의 한 시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춘의 의미를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없는 물음을 가지고 고민하다 보면 좌절이나 당혹감을 맛볼지도 모르지만, 고뇌 없는 청춘은 ‘바싹 마른 건조한 청춘’, 즉 반드시 겪고 넘어서야 할 인생의 고비를 지나치고 늙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청춘의 방황을 겪지 않고 별다른 고통 없이 목표한 바를 이룬 인생은 공허함을 느끼게 할 것이라고요. 청춘은 좌절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실패가 있기 때문에 좋은 시기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렇다면 여기에 덧붙여 고통이란 이런 ‘고민하는 힘’을 만들어 주는 최소한의 조건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하기에 고통은 피해야 할 시련이 아니라 기꺼이 감수할 수 있고 나를 성장시키는 ‘힘’이 된다고 말입니다.     


오늘도 고통 가운데 지내셨다면, 그 고통이 나의 ‘힘’으로 축척될 수 있도록 주문을 한번 외워보시기 바랍니다. “고통아! 너로 인해 고민하는 나는 매일이 '청춘'이란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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