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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 테라피스트 R Nov 20. 2019

내 인생의 주인이 되려면 이들처럼

'주는 것'이 왜 '받는 것'일까요?

60대 여성분들을 위한 독서모임에 도우미로 참여했을 때의 일입니다. 모임의 테마는 ‘고전문학 다르게 읽기’였습니다. 첫날 배포된 자료는 선녀와 나무꾼이었습니다. 누구나 아는, 하지만 아동 때 읽어보고는 다시는 읽지 않았던 전래동화책을 자유로운 버전으로 각자 가까운 도서관에서 골라오셨습니다.     

잠깐 부연설명을 붙이자면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채록된 <나뭇꾼과 선녀>는 29편이 있다고 합니다. 또 유럽, 몽골, 중국, 일본에서 전승되는 유사 설화가 있습니다. 결론이 지니는 특징을 보자면 기본적으로 <나뭇꾼과 선녀>는 나뭇꾼의 결핍으로 이야기가 시작하여 선녀가 승천하는 것으로 끝나는 ‘선녀 승천형’이 있습니다. 그 기본형을 중심으로 변이형이 나타나는데요, 첫 번째는 ‘나무꾼 승천형’으로 기본형의 결말에 승천한 선녀를 되찾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는 나뭇꾼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나뭇꾼 천상 시련 극복형’으로 천상에 도착한 나뭇꾼이 천상계의 인정을 얻기 위해 부과되는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가 첨가된 것을 일컫습니다. 세 번째는 나뭇꾼이 지상으로 회귀하는 이야기가 첨가된 ‘나뭇꾼 지상 회귀형’이 있습니다.     




디테일과 결론 부분이 약간씩은 다른 선녀와 나무꾼에는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우선 나뭇꾼의 홀어머니가 꼭 등장하였습니다. 우리나라나 중국, 일본에서는 선녀가 등장하지만 유럽에서는 백조가 등장하기도 하는 등 각 나라마다 문화마다 특성에 따른 등장인물의 편차는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유난히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홀어머니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나뭇꾼이 선녀와 헤어지게 될 때에도 홀어머니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예를 들어 나뭇꾼이 아이들이 보고 싶어 매일 눈물로 지새우고, 마침 지나가던 사슴의 귀뜸 덕분에 나뭇꾼은 선녀들이 타던 두레박에 올라타서 하늘로 승천하게 됩니다. 그렇게 선녀와 아이들과 잘 지내다가 어느 날 하늘에서 내려다본 지상의 어머니 가여워 옥황상제의 말을 타고 잠시 땅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단, 절대 말등 위에서 내려오면 안 된다는 조건을 듣게 되지요. 하지만 오랜만에 나뭇꾼을 본 어머니는 나뭇꾼이 평소 좋아했던 호박죽을 쑤어와서 굳이 나뭇꾼에게 건네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뜨거운 호박죽을 말등에 흘린 나뭇꾼은 땅에 곤두박질치게 되고, 이후로 영영 아내와 아이들과는 이별하고 맙니다.    

흥미로운 부분은 당시 여성에게 부여된 ‘모성애’의 관념입니다. 나뭇꾼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선녀 역시 여성이지만 ‘어머니’라는 역할에 고정되어 가족과 자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가치 부여로, 자식의 보답으로써 나뭇꾼에게는 ‘효’가 강조됩니다. 그래서일까요? 결론은 다양화되고 있습니다. 나뭇꾼의 원초적 욕망인, 선녀와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 그것과는 다소 다른 방향이지만 지상으로의 돌아오게 되는 결심. 후자의 경우 나뭇꾼은 홀어머니에 대한 도의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한국사회에서 혈연적인 가치가 중요하게 다뤄진다는 것을 알 수 있구요.    


60대 어머님들과 토론이 시작되자, 어머님들은 대부분 효자인 나뭇꾼의 선택 즉, 잠시 어머니를 뵈러 땅에 내려온 행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뜨거운 호박죽을 건네 준 나뭇꾼 어머니의 행동은 경솔했다고 입을 모으셨습니다. 본인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지만 아내와 아이들과 떨어져서 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시더군요. 한때 유행했던 기러기 아빠의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가족은 한 지붕 아래 정을 나누고 살아야 오래도록 끈끈한 가족애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씀과 함께요. 결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던 중, 어머님들은 다양한 솔류션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나뭇꾼 엄마도 그 나이까지 아무 것도 안하고 지내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들을 키우려고 열심히 바느질을 하든 농사를 짓든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겠죠? 그러니까 나이 먹어서도 아들 며느리에게 의지하지 않으려면 자기 일이 있어야 해요. 수입도 있으면 더 좋구요. 그래야 아들도 어머니가 염려되어 땅에까지 내려오느라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나뭇꾼처럼 하나만 생각하는 아들도 답답해요. 요즘 같은 세상에 굳이 와서 만나야만 하나요? 영상통화를 할 수도 있고 이메일을 보낼 수도 있구. 아님, 가끔 옥황상제와 선녀와 다같이 나들이 삼아 땅으로 놀러와도 괜찮지 않겠어요?”

“맞아요. 나뭇꾼 엄마 정도 나이면 아직 청춘이죠. 나가서 사람들도 만나고 자기 취미도 즐기고. 이제 자식들한테서 홀가분해졌는데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되지요. 굳이 홀어머니를 불쌍하다고만 묘사하는 문학작품에도 문제가 있어요.”

“맞아요. 그러다가 정 몸이 노쇠해지면 나뭇꾼 엄마도 옥황상제 허락을 받아서 선녀와 나뭇꾼과 같이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살면 되지요~.”


말씀을 듣다보니, 당신들은 시부모님 모시고 고된 시집살이로 대부분 힘든 세월을 보내셨지만 자식들에게는 짐이 되고 싶지 않은, 쿨한 어머니로 당당하게 보이고픈 마음들이 느껴졌습니다. 또 인생 후반전을 각자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로 채우고 계신 -수필가로 낭독 봉사자로, 아르바이트로, 다양한 동아리 회원으로 활동하시는- 어머님들의 면면이 느껴지는 토론이었습니다.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가 시대마다 변화되어 왔습니다. 한 때 모성성이 가정을 가진 여성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오히려 요즘에는 자기실현과 전문적인 일에 대한 성과로 그 중요도가 점차 옮겨지는 듯합니다.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던 것은 어머님들께서 자신들의 힘들었던 과거를 마냥 ‘~~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이 아니고, 또 후대의 누군가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고리를 끊고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나가려는 의지를 보여주셨다는 점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의지대로 안 되는 일 때문에 좌절할 일이 수없이 있습니다. 누가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인생의 진정한 묘미는 내 뜻대로 안되는 것입니다,라고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가장 좌절했을 때를 돌이켜보면 나의 뜻대로 안 될 때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은 오른쪽인데 굳이 내 인생은 왼쪽으로 질질 끌려 가는 듯 할 때가 있지요.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또한 품어야 할 내 인생의 일부입니다. 또, 지나고 생각해보면 내 길이 오른쪽 방향으로 펼쳐졌을 때 진정 내가 행복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안의 자아는 ‘내 뜻’대로 안 될 때 불끈 화를 내곤 합니다. 그 화가 더 심해지면 ‘남 탓’이 되지요. ‘내가 지금 여기, 이 자리에만 있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이렇게 사는 건 다 00 탓이야.’라고요.


그럴 때는 한 번 이런 생각을 해보시면 어떨까요?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그조차도 사실 그 사람의 ‘뜻대로’는 아닙니다. 우리들은 그야말로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지요. 죽음은 또 어떤가요? 그 또한 그 사람의 ‘뜻대로’가 아닙니다. 죽음의 순간, 죽음의 방법 등도 하늘만이 아시지요. 그렇다면 과연 이 세상에서 한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물론 사람에 따라 다양하겠지만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주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어떤 것이든 –재능, 재물, 시간, 가치 등등-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세상을 향해 ‘주는 것’. 이것은 자유 의지를 지닌 인간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외부의 어떤 조건에도 휘둘리지 않고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주는 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베푸는 것’이 됩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그래서 ‘giving’이 ‘taking’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입니다. ‘베푸는 사람’이 곧 ‘복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신 하늘의 뜻이자, 신의 뜻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도 이와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천사 미하엘이 하나님의 지시를 거역하여 인간 세상에 오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과제에 대해 답하는 부분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다는 걸 깨달았죠!
사람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아는 능력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한 염려가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한 걱정과 보살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는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선을 행하는 것인데,
오직 그 하나를 위해 인간은 이 세상에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에서)




<나뭇꾼과 선녀>의 이야기를 하다, 좀 다른 방향의 결론이 난 것 같네요~. 그럼에도 마무리를 하자면,

모쪼록 오늘을 감사하며, 일하시는 어떤 자리에서든 작으나마 기쁨과 행복을 나누는 모두가 되시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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