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델몬키 Feb 14. 2024

관찰 일기

나와 나타샤와 흰 캥거루

1. 지하철 꼬리칸의 영업 기밀을 폭로했던 그 아저씨(좌표)가 유난히 자리를 옮겨 다닌다. 오늘따라 열차칸이 한산했는데, 그게 신이 났는지 자동차라도 사러 온 사람처럼 여기 앉았다 저기 앉았다 하는 중이다. 쿠션감을 확인하는 듯 등받이에 몸을 쿵쿵 부딪혀보고, 엉덩이에 깔린 코트깃을 공작새처럼 촤아 펼쳤다가, 두리번대더니 냉큼 또 자리를 옮겨갔다.


그때, 그동안 아저씨에게서 받은 빈 수레처럼 요란하고 가벼운 인상의 근거를 알아냈다. 그것은 유난히 가볍고 맑은 구두 소리였다. 아저씨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실로폰처럼 높고 경쾌한 소리가 또깡또깡 울렸다. 구두굽 소리를 여자키로 올리고 거기에 에코라도 넣은 듯 말이다. 봉이 있는 가장자리 좌석이 나자 아저씨는 신이 나서 달려갔고, 실로폰도 함께 울렸다. 그 모습이 밉지 않은 출근길이었다. 모처럼 모두가 편안하게 앉아 왔으니까.


2. 그렇게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여유롭게. 언젠가 동료가 "현아님은 텀블러에 국밥 같은 걸 담으신 건가요?"라고 물어봤다. 내가 아침마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시원한 국물을 들이킨 아저씨처럼 "어윽, 어윽"거린 거린다는 거다. 


제가요? 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한 모금 마시자마자 나도 모르게 그 소리가 또 났다. 아이고, 정말 그러네요. 죄송합니다. 나는 껄껄 웃으며 앞으로 소리를 안 내보겠다고 약속했다. 


"듣기 싫은 건 아니구요, 커피가 엄청 얼큰해 보여서 한 번 마셔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동료의 자리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놓여 있었다. 뜨겁고 시원한 커피의 해학을 알려면 아직 멀었군, 젊은이. 얼죽아의 특권을 마음껏 즐기게나. 나중엔 뼈 마디마디가 많이 시릴 것이야.


나는 흐뭇한 시선을 거두고 아랫목처럼 뜨끈한 커피를 들이켰다.

어윽, 시원해. 이번엔 속으로 외쳤다. 


3. 한참 운동에 빠졌을 때, 집앞 공원에 자주 뛰러 나갔다. 한날은 어떤 젊은 남자가 스윽 따라붙더니 "앗! 자주 뵙네요. 뛰는 게 특이해서 기억합니다."라고 말을 붙였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그저 "아, 안녕하세요?"하고 음흉한 마음을 감췄다. 그리고 그를 의식하며 좀 더 경쾌하게 뛰었다. 옆에서 남자는 보조를 맞추며 연신 뭐라고 종알댔다. 원하면 가끔씩 만나서 런닝도 같이 하잰다. 그냥 뒀다. 나도 좀... 즐기고 싶었으니까! 


그때 멀리서 개를 끌고 산책을 나온 남편이 보였다. 잠깐 즐거웠으니 그럼 이만, 하며 명랑하게 남편에게 뛰어갔더니 "여보 뛰는 게 왜 그래?"라며 남편이 정색한다. 

"캥거룬줄 알았어. 왜 위로 뛰어? 그러면 힘들텐데. 다시 뛰어봐봐."

"아, 됐다고!!!"


그 남자가 분명히 "뛰는 게 특이해서" 날 기억한댔는데. 혹시 한밤 중에 출몰한다는 인간 캥거루를 제 손으로 고쳐보고 싶었던 운동 전도사였을까. 아니라고본다. 분명히 나에게 호감이 있었다! 미친 캥거루처럼 겅충겅충 날뛰며 페로몬을 풍기는 여자 사람에게 끌릴 수도 있잖아? 새로운 장르잖아? 어쩌면 내가 싱글이었다면 그와 커피 한 잔 정돈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 걱정마시라. 커피를 마시며 "어윽, 시원해" 정도는 참아볼 참이다. 그리고 아직도 캥거루처럼 뛴다.

작가의 이전글 평양냉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