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아픔의 순간들, 사랑의 순간들.
원글: https://blog.naver.com/s_hi/223116628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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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동갑 친구들과 우리가 나이 먹은 얘기를 하다가 내가 이런 말을 했다.
"이제는 부모님이 지금 내 나이였을 때의 모습이 기억나는 나이가 된 게 신기하지 않아?"
각자의 부모님이 결혼한 나이, 출산한 나이, 본인의 형제 관계에서 순서, 본인이 기억하는 '가장 어린 순간(가장 오래된 기억)' 등등에 따라 차이가 나겠지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억한다는 건 그때의 부모님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때의 나의 모습도 떠오르기 마련이다.
당시에 스스로는 다 컸다고 생각한 내가 얼마나 어렸고 어린이답고 유치하기까지 했는지, 하늘 같던 부모님도 사실 얼마나 젊고 또 어렸는지, 그랬던 만큼 부족한 면도 여럿 있었다는 것까지.
그리고 만약 그때 내가 몰랐던, 알 수 없었던 부모와 보호자의 아픔들이 '내'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보인다면 그건 또 지금 내게 얼마나 아픈 일이 될까. 시간을 돌려서 그 옆에서 위로해 주고 싶어지는 마음. 그러나 그 어린 나이에 몰랐던 건 너무나 당연하므로.
어렸기에 몰랐고, 특히 어린 내가 모르게 하기 위해 상대가 노력까지 했다면 더욱더... 몰랐던 게 잘못은 아니지. 하지만 아픈 일이 되고 만다.
앞서 말했듯 최근 친구들과 저런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나에게 이 영화는 전혀 어렵지 않았고 모든 게 너무 쉽게 이해됐고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더불어 내가 '딸'이라서 더 쉽게 와닿았던 면도 있었던 거 같다)
이 영화는 많은 것을 보여주지만 대놓고 보여주지는 않는다. 또한 허투루 쓰는 장면이나 대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시적이었다. (전에 이런 평가를 다른 영화에도 쓴 적이 있다) 나는 문학 중에서는 시를 가장 어려워하지만 시적으로 연출된 영화를 좋아하는 거 같다. 그 은유와 함의를 하나하나 찾아가는 일. 그 은은한 통렬함을 찾아가는 일이라서.
영화의 처음이 아빠와의 여름휴가 추억의 여러 가지 중에서 소피와 아빠의 나이를 언급하는 부분부터 시작하는 건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 장면은 영화의 중후반부에 해당 장면 전후 상황까지 이어져서 제대로 다시 나오기까지 한다. 즉, 일부러 처음에 배치하며 똑같은 장면을 한 번 더 보여주기까지 했다는 거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는 그 나이 정보가 중요했던 거 같다.
그렇게 처음부터 보여준 나이 정보에 의하면 소피는 열한 살, 아빠 캘럼은 곧 서른하나가 되는 서른 살이다. 그러니 아마 소피는 "지금 내 나이였을 때의 아빠 모습"을 기억하는 순간이 조금 더 빨리 왔을 것이고, 당시의 아빠의 모습들도 더 선명하게 기억이 났을 것이다.
소피의 나이는 한국으로 친다면 초등학교 5~6학년 정도의 나이이고 사실 이 나이는 상당히 애매한 나이이다. 나도 그 나이를 지나왔기에 알 수 있다. 만 나이로도 열 살 넘었으니까 십 대는 맞는데, 틴에이저 문화에서는 배제되던 기억이 선명하다. 개개인에 따라 2차 성징이 왔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며 보통 어린이 취급은 못 받지만 성인 취급은 절대 받을 수 없다(후자는 받아서도 안 된다).
소피도 그런 애매한 나이이고 애매한 상황임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계속 나온다. 어리다고도 할 수 없고 어른이라고도 할 수 없는, 그러나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고는 할 수 있는 순간들, 묘사들, 소피의 입장들.
○ 호텔에 도착한 순간 소피를 로비에 둔 채 아빠 캘럼은 위에 올라갔다 오려고, 잠시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하고 소피는 쳐다보지도 않고 알겠다고 한다. 아빠는 계단을 오르다가 (이 어린 딸을 혼자 로비에 두고 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멈춰서 다시 내려오려는데 역시 소피가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난 괜찮아."
아빠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 마음까지 헤아리고 실제로 그 정도 시간 혼자 있는 것 정도는 괜찮기에 한 말일 것이다.
○ 그 잠깐 사이에 소피는 로비에 있던, 책 제목은 보이지 않지만 핑크빛 표지에 입술 모양의 그림이 있는 책에 관심을 가진다. (성적 호기심) 그리고 아빠가 내려오자 바로 그 책을 안 보던 척 한다.
○ 호텔은 이런저런 시설이 있지만 시설 중 일부는 공사를 하고 있어서 호텔 휴양지인데 동시에 공사판의 느낌이 있다. 그런 곳에서 휴가를 보내게 된 것에 대해 아빠는 소피에게 미안해하지만 정작 소피는 불평 같은 거 하지 않는다.
○ 수영장에서 선크림을 발라주던 아빠는, 팔에도 튜브를 끼워야 하는 정도로 어린 여자애들을 보면서 소피에게 말한다. "저기 가서 쟤네랑 놀아." 소피는 답한다. "쟤넨 어린애들이잖아." 이런 장면이 영화 후반에 한번 더 나온다. 아빠는 소피더러 어린 애들이랑 놀라고 하고, 소피는 거부하는 모습.
○ 소피는 화장실에서 언니들이 하는 대화를 아주 호기심 가득하게 몰래 쳐다보며 듣는다. 대화 내용은 19금이었고 그들은 대화를 끝내고 나가며 말한다. "쟤가 들었을까?" / "뭐 어때? 어린앤데."
이 대화를 들은 뒤 소피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거울을 바라본다. '알아들었지만. 나는 어린애로밖에 안 보이는구나.'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
○ 아빠와 소피가 당구를 치고 있을 때 오빠들이 와서 다음 차례를 찜한다. 그때 '소피'가 먼저 제안한다. 같이 칠래요?라고.
이때 소피 부녀는 남매로 오해받는다. 개개인의 생각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부녀라고 하기엔 확실히 적은 나이 차이로 보인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함께 게임을 하던 중 한 명이 '퍼킹'과 같은 욕을 하자 다른 친구가 욕하지 말라고 말린다. '어린애 앞에서 욕하지 마'의 의미이다. ― 또한 이 오빠들은, 다른 장면에서 친구 커플의 진한 스킨십 앞에서 넌 저런 거 보면 안 된다며 소피의 눈을 가려주기도 한다.
○ 수영장 근처에서 가기 싫다고, 더 놀 거라고 땡깡부리며 거의 드러눕는 남자 어린이. 그리고 말썽 좀 그만 피우라며 화내는 (남자아이의) 아빠는 결국 아이를 들처업고 간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자기 아빠를 바라보는 소피. 소피 본인은 그런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가 아니기 때문에(아니란 것을 본인도 알기 때문에).
○ 소피는 패러글라이딩?을 보며 저거 하고 싶다고 하지만 그건 어려서 할 수 없다고 한다(소피 나이가 실제로 제약이 걸릴 만큼 어림).
○ 소피는 아빠에게 묻는다. 왜 엄마랑 통화할 때 사랑한다고 인사해? 아마 그냥 인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말을 보면 소피가 궁금했던 것은 '왜 안 사랑하면서 사랑한다고 해?' 보다는 '왜 나에게 희망을 줘?'에 가까웠던 거 같다.
○ 위와 바로 이어지는 장면인데 소피가 자기가 어렸을 때―현재 열한 살인 소피는 본인의 일곱살때를 '어릴 때'라고 표현한다. 지금도 어리지만 소피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본인이 다 컸다고 생각했을 것― engaged라는 말에 통화중이라는 뜻이 있는 걸 몰라서 엄마아빠가 약혼한 줄 알고, 둘이 결혼하는 줄 알고 신났었다고 한다. 소피는 결국 엄마아빠의 이혼에서 받은 상처가 있었을 것이고 둘의 재결합을 바라는 어린 소녀이다.
○ 아빠와 수중 활동을 할 때 일체형 수영복을 입고 있던 소피. 그리고 배 위에 올라와서 한 커플을 바라본다. 남자는 비키니를 입은 여자의 등에 선크림을 발라주는 모습을 계속 바라보는 소피.
그리고 이후 어느 장면 부터는 소피가 비키니 위에 원피스를 입고 있을 때가 종종 있다. 아빠가 "갑자기 왜 비키니를 입었어?"라고 묻는데 "그냥(I don't know)."이라고 답한다.
○ 물 속에서 아빠와의 의사소통 오류로 아빠가 건네주는 물안경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물안경을 잃어버렸다. 아빠는 장난치지 말라는 정도로만 말했는데 물 위에 올라온 소피는 먼저 말한다. 못봤다고. 비싼 건데... (→이 말도 중요하다. 소피가 돈, 아빠의 재정상태를 의식하고 있다는 점). 사실 아빠가 크게/엄하게 화를 내거나 책망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아빠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인다.
○ 아빠와 함께 구경하던 카페트. 소피가 예쁘다고 한 카페트의 가격을 아빠가 물어보고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 고민에 잠긴 아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 소피.
○ 아빠 캘럼이 소피와 늘 해왔던 노래 자랑? 시간에 소피가 이미 신청해놓은 순서에도 나오지 않고 소피 혼자 노래를 부르게 만든다. 소피는 화가 많이 났지만 다음날 아빠가 사과할 때 괜찮다고 별거 아니라고 말하며 아빠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려 한다.
소피가 마냥 어린애는 아니지만 어른은커녕 청소년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게 사실이고 그런 취급들을 받는다. 소피는 뚜렷한 2차 성징도 오지 않은 거 같고 실제로 어리기에 아빠의 아픔이나 어려움까지는 딱히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그게 당연한 나이라는 거다. 어릴 때 어린 게 잘못인가? 심지어 마냥 어리지도 않았고 나이치고는 성숙했다. 그럼에도 스스로 내가 다 컸다고 생각하던 시절을 돌아봤을 때 내가 너무 어렸기에 몰랐던 게 많았다는 걸 알게 되는 건 얼마나 아픈 깨달음의 순간인가.
캘럼의 지난 30년은 어땠을까. 조각들을 모아보면 별로 순탄했던 거 같지는 않다.
● 열아홉의 나이에 소피가 태어나고 아빠가 되었다. 아마 계획하고 원했던, 성숙한 형태의 결혼은 아니었을 확률이 높다.
● 소피가 일곱 살일 때 소피의 엄마와는 이혼한 상태(아마 소피 나이 다섯살 이전에 이혼한 것 같음)였다면 이미 그 이전에 이혼했고 그 이혼까지 향해가는 쉽지 않은, 순탄치 못한 결혼생활과 같은 과정도 있었을 테다.
● 소피가 아빠의 열한 살 생일은 어땠냐고 물어봤고 캘럼이 말해준 본인의 열한 살 생일의 기억이 별로 행복해 보이지도 않는다(소피도 슬프다고 말함). 그렇다면 아마 많은 사랑을 받은 성장환경도 아니었던 거 같다.
● 딸도 기억하는 새로운 애인과 잘 되어가는 듯 했으나 그 애인은 전 애인에게 돌아가며 끝이 났고, 딸도 기억하는 카페 사업도 접었다고 한다. (관계도, 사업도 잘 되지 않고 있음)
● 영화의 시작에 소피의 아빠는 오른 팔을 깁스하고 있고 아마 소피에게 넘어져서 다쳤다고 했던가보다. 화장실에서 깁스를 자르고 있는 아빠에게 소피는 무심하게 묻는다. "손목 부러졌을 때 아팠어? 넘어졌을 때 말야." 그런데 아빠의 대답은 애매하다. "글쎄, 기억 안 나. 부러진 줄도 몰랐어. 부러져본 적이 없으니까." 어디 부러져본 적이 없었다면 오히려 더욱더 아프고 고통스러웠을 순간인데. 나의 추측은 술이나 약에 취한 상태였거나 아니면 넘어져서 부러진 게 아니었던 거 같다. 그러나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지.
● 소피와의 시간을 보내던 중 자신이 스쿠버다이빙 옷을 입는 걸 도와준 직원과 대화하게 된 캘럼. 그 직원이 말한 내용을 요약하면 "여행을 많이 갔었지만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고향이 그리운 게 컸다. 곧 아이 아빠가 된다. 아빠는 마흔 살에나 될 줄 알았는데."
이 말에 캘럼의 반응이 인상깊다. "마흔은 상상도 안 돼요. 서른 살이 됐을 때도 놀랐는데." 이렇게 웃으며 답했지만 이후 그의 표정은 급격히 안 좋아진다.
― 다른 장면에서 소피가 묻는다. "할머니(캘럼에겐 엄마)는 안 만나?" 캘럼은 한참의 침묵 끝에 건조하게 말한다. "응. 안 만나."
― 또 다른 장면에서 소피가 묻는다. "스코틀랜드엔 안 돌아와?" 캘럼이 답한다. "응. 거긴 나에게 과거일 뿐이야. 난 거기서 단 한번도 소속감을 느낀 적이 없어."
이 답변들을 보면, 그가 스쿠버 다이빙 직원과의 대화 이후 표정이 안 좋아졌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그 사람과 캘럼의 과거 및 상황이 너무나 대비됐기 때문이겠지. 캘럼에게 원가족은 아름답거나 따뜻한 존재가 아닌 거 같다. 그런데 이미 이혼도 했으니 와이프도 그럴 존재까지는 아니고... 결국 그에게 소중한 존재는 소피 하나뿐이었을 수도 있다.
● 소피에게 아빠 숙소 가서 돈을 가져온다고 말하고 걸어가는 캘럼. 이때 캘럼은 차도를 건너면서도 좌우를 전혀 확인하지 않아서 무려 관광버스가 그에게 경적을 크게 울린다. 그럼에도 돌아보지도 않는다. 주의를 신경쓰지 않거나 신경쓸 여력이 없거나 혹은 아무래도 상관없거나. (이 순간 소피는 또래 친구와 게임을 하고 있었다)
여러 아픔이 있었던 거 같지만, 그리고 힘든 심리 상태가 현재형으로도 이어지지만 그런 것에 비해 아빠는 놀라울 정도로 소피를 적당히 잘 대해준다. 폭력적인 모습도 없다. 이 애매한 나이의 딸을 마냥 어린애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대등한 어른에게 호소하듯(한다면 소피에게 부담이 될 것임) 하지도 않는다.
● 호텔에 도착해서 침대가 하나인 것을 보고 당황하여(예약 내용과 다름) 프런트에 연락을 한다. 그리고 조금 낮은 간이침대를 받아서 여행 내내 본인이 간이침대에서 자고 딸 소피를 침대에서 재운다. 중요한 건 침대를 분리해서 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피가 이미 어린이에서 여자로 향해 가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고 그걸 배려하는 아빠라는 점이다.
● 낮에는 소피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아빠는, 소피만 잠든 밤에는 비디오로 찍어둔 소피의 영상을 다시 본다. 낮에도 밤에도 한없이 눈에 담고 싶을 만큼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 그리고 밤에 호텔에서 딸에게 호신술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소피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조금 재미없는 장난처럼 느끼는 것 같지만 아빠는 매우 진지하다. 꼭 알아야 된다고. 필요한 거라고.
● 욕실에서 소피와 대화하며 깁스를 자르던 아빠는 실수로 살을 잘랐는지 깁스 아래로 피가 주르륵 흐르는 장면이 나온다. 분명 아팠을 텐데 아빠는 아픈 티를 전혀 내지 않으므로 소피는 모르고 넘어간다. 사실 '아프다'는 말 정도는 할 수도 있는 건데도, 그는 조용히 참는다.
● 소피의 학교 선생 얘기를 하고, 캘럼이 기억하자 소피는 어떻게 기억하냐고 의아해한다. 캘럼은 장난스레 그 선생님 예쁘잖아, 라고 말하고 소피는 그런 아빠를 징그러워하지만. 그저 딸을 사랑해서 소피와 관련된 것은 다 기억하는 것이다. 영화 초반에도 지난 번에 엄마랑 사이 안 좋다더니 요즘은 어떠냐고 묻기도 한다(정작 이때 소피는 엄마? 왜? 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모든 순간에 다정하고 친절하기만 한 건 아니다.
대체로 친절하고 좋은 휴가를 보내주려고 노력하는 캘럼이 소피에게 친절하지도 다정하지도 못한 반응을 보여준 순간이 몇 개 있다. 이 순간들이 가장 결정적인 모습이었다. 사실 평소에 친절하거나 다정하지 않았더라도 '하필 저 순간에 저러지는 않을 텐데' 싶었던 순간들.
1. 소피가 장난스레 인터뷰식으로 아빠는 열한 살 때 어땠냐고, 11살 때 지금 나이에 뭐 하고 있을 거냐고 생각했냐고 질문했을 때, 장난기 많고 소피와 수시로 장난을 치던 캘럼은 그 장난을 받아주지 않는다. 카메라로 찍고 있는 소피를 외면하고 카메라를 끄라고 한다. 소피가 아닌 척 계속 카메라를 킨 상태로 있자 캘럼이 강제로 꺼버린다. 현재 자신의 처지에 회한과 한숨이 가득한 캘럼에게는 어린 딸의 귀여운 질문도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2. 소피가 아빠와 노래 참가 신청을 했다. 심지어 소피의 말을 들어보면 5살때부터 늘 해왔던 둘만의 추억이자 이벤트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캘럼은 당황하더니 끝까지 나가지 않는다. 소피는 앞에서 혼자 뻘쭘하게 노래를 부르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캘럼의 표정도 편치 않다. 차라리 딸 혼자 무대를 해내는 걸 대견하게 바라볼 수도 있을 텐데 캘럼의 표정은 괴로움에 가까워보인다.
아마 캘럼은 다른 사람 앞에 서서 주목을 받는 행위 자체가 이미 너무 힘든 심리상태가 됐던 거 같다.
*내 생각엔 이 순간이 캘럼의 우울과 안좋은 결단을 가속화하는 사건이었던 거 같다. 자신의 심리적 문제가 원인이 되어 세상에서 가장(어쩌면 유일하게) 사랑하는 딸에게 상처를 줬다. 그 사실이 다시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가속화 했으리라.
3. 소피가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생일 축하 노래 이벤트를 해줬을 때. 보통의 경우 딸에 대한 애정이 그리 각별하진 않았더라도 정말 기쁘고 대견하고 사랑스럽다고 느꼈을 순간인데 정작 캘럼의 표정은 미묘하다. 생을 버티는 게 힘들어서 끝을 결단하고 싶을 정도의 마음을 가진 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들려주는 '생일 축하' 노래라면, 그런 표정이 나올 거 같다.
2번의 상황(소피 혼자 무대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고 돌아옴) 이후 소피는 화가 났다. 캘럼은 미안하기도 했을 테고 장난스럽게 "노래 학원 갈래?" 라는 식의 농담으로 무마해보려 하지만 소피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도 않지만) 웃지도 않고 아빠 말에 대답도 안 하려고 한다.
캘럼도 눈치를 챘고 "그래 오늘은 일찍 들어가자"고 하는데도 같이 가기 싫어한다. 소피는 더 있다가 갈 거라고 하고 캘럼 먼저 들어간다.
아빠가 들어간 뒤 소피는 휴가 기간 내내 여러 번 마주쳤던 언니오빠들 옆에서 그들이 노는 걸 구경한다(동경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조금 구경하다가 숙소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밤에 혼자 나온 건 처음이라 길이 헷갈린다. 그때 전에 함께 게임을 했던 자기 또래 남자애 마이클을 만나서 몰랐던 조용한 수영장도 가보고 그곳에서 마이클과 키스도 해본다.
캘럼의 행동은 너무 다양하게 나온다. 방에 들어가서 소피와 찍은 비디오를 보며 한숨을 쉰다. 밖에 나가 배회하다가 남이 버린 담배꽁초를 주워 피운다. 그러고 바다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
└나는 이 순간 정말 너무 놀라서 (딸과 함께 온 휴가지에서 저런 선택을 한다고!!) 그 어두운 화면을 정말 뚫어져라 쳐다봤다. 캘럼은 바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소피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웬걸 캘럼은 그냥 방에서 알몸으로 자고 있었다.
다음날 유황온천?에서 서로에게 머드를 발라준다.
이때 소피가 아빠 캘럼의 어깨에 있는 상처를 보고 묻는다.
"어깨는 왜 이래?"
"몰라."
그 상처는 분명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인다.
캘럼이 소피에게 어제 일에 대해 사과한다. 소피는 괜찮다고 했지만 캘럼은 확실히 사과를 한다. 어제 네 침대에서 뻗어버린 것, 어제 ... 이벤트에 함께하지 못한 것. 끝까지 말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미안하다는 말 만큼은 확실히 한다.
시간을 보내며 소피는 어제 무엇을 했는지 말한다. 마이클이란 남자애와 첫키스를 했다는 것까지-
즉, 반대로, 캘럼이 의도적으로 소피가 모르게 했기 때문에 소피는 아빠 캘럼이 어제 뭘 했는지 모른다.
따라서 각자 보낸 그 밤에 캘럼이 했던 일들은 소피의 추측일 것이다.
알고 있는 것은 아빠의 어깨가 다쳐있고, 어젯밤 숙소에 들어갔을 때 아빠가 알몸으로 자고 있었다는 것. 그 단서들로 하는 추측들.
물론 진실은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어디에도 나가지 않고 방에서 알몸으로 울다가 잠들었는지도 모른다. (이조차 영화속 장면으로 나오긴 하는데, 같은 색깔로 표시한 것들처럼 소피가 추측한 장면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빠가 말해주지 않으니까, 티내지 않으려 노력했으니까. 그리고 어린 딸에게 아빠가 자신의 우울을 감추는 것이 잘못된 행동도 아니니까. 오히려 옳은 행동에 가까울 것이다...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캘럼은 소피 앞에서만큼은 이런저런 조언도 해주고 언제나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소피에게 전하려고 한다. 네가 원하는 곳 어디서든 살 수 있고,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며.
소피와의 그 여행 이후, 캘럼은 소피에게 카드와 카페트가 도착하게 준비해두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 같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복선도 세 번 정도 나왔다.
1) 여정 중 소피가 숙소 침대에 드러누워서 뭔가 우울한 거 같다고 말한다. 아마 피곤한 감정과 조금 헷갈렸을 수도 있을 거 같지만. "재밌는 하루를 보내고 와서 지치고 멍한데 뼈들이 제대로 안 움직이는 느낌 있잖아?" 캘럼은 그 말을 듣고 애매한 표정을 짓지만, 오히려 더 화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오늘은 일찍 들어오자며 소피를 데리고 나간다.
2) 하늘을 보며 소피가 아빠에게 말한다. "가끔 하늘을 보면서 우리가 같은 하늘 같은 태양 아래 있다는 걸 떠올려. 그러면 우리는 같이 있는 거니까."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상황의 변화가 이어질 것이므로 나온 대사라고 생각한다.
3) 머드를 바르면서 캘럼이 말한다. "이거 클레오파트라도 했던 거야. 뱀에 물려 죽기 전에." 소피가 말한다. "그건 일종의 자살이었다고 생각해."
진짜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정황상 자살이었을 확률이 높은 이야기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캘럼의 이야기도 그런 셈이다.
내가 나의 가족에게 영화의 전체 내용은 말하지도 않고 '여름휴가에 와서 서른쯤 된 아빠가 열한 살 딸에게 호신술을 가르쳐 주는 장면' 만을 얘기했더니 가족은 정확히 이렇게 말했다.
"내가 딸 옆에 있을 땐 내가 지켜주면 되지만, 내가 없으면 못 지켜주니까. 아빠가 옆에 있어줄 수 없었나 보네."
이런 걸 보면 딸을 둔 아빠의 마음이라는 게 다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미 부모님이 이혼해서 떨어져 지내고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떨어짐을 의미하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휴가 말미의 대화에서 나온다.
소피는 휴가가 만족스러웠던 거 같고 여기에 계속 더 있고 싶다고 한다.
아빠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 결국 그 대화의 마무리는 소피가 한다. "계속 호텔에서 지낼 순 없지." (이조차 소피의 나이를 생각하면 성숙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보통의, 평범한 상황/상태인 아빠라면 대체로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게. 며칠 더 있을까? 하지만 너 학교 가야지. 우리 내년에 또 오면 돼."
하지만 미래를 말할 수 없고 미래를 약속하는 건 더 어려운 상황/심정에 처해 있는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장면 이후 소피는 아빠와 함께 춤을 춘다. 그 춤을 추는 배경으로 나오는 노래의 가사 자막을 보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거리의 사람들, 세상의 실체를 안다는 건 끔찍한 일이야. 착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 "날 내보내 줘!"
내일은 상황이 나아지길 기도해. 억압받는 사람들 거리의 사람들 앞이 안 보이는 것처럼 외면하면서 중립을 지키려 하지만 아무 소용 없네.
끊임없이 사랑을 원하지만 찢겨 상처로 너덜거리네. 도대체 왜? 사랑, 사랑, 사랑...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순 없을까? 왜 사랑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는 없지?
왜 우린 사랑을, 사랑을, 사랑을 줄 수 없을까. 왜냐면 사랑은 이제 낡은 표현이니까
하지만 사랑은 우리가 밤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게 하고 또 사랑은 우리가 스스로를 돌보는 방식까지 바꾸게 하지.
이건 우리의 마지막 춤이야. 우리 자신의 모습이지.
- 소피 아빠의 마음이 이러지 않았을까 싶던 노래가사.
영화 중간중간 나오던 깜빡거리는, 어두운 조명 속에서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든 춤을 추는 모습들이... 내 생각에는 성인이 된 소피가 회상하는 아빠의 마지막 춤의 순간이 아닌가 싶다.
아빠 그때 무슨 생각 했어? 정말 즐거워하면서 춤췄던 거 맞아? 나와의 마지막 춤을 추면서... 웃었어? 울었어?
실제로 그 어렸던 소피가 함께 춤추던 아빠의 모습을 정확히 기억할까? 소피의 기억 속에는 휴가 마지막 날 밤 함께 즐겁게 마지막 춤을 추던 즐거운 순간 정도로 남았을 것이다. 밤이었으니까 실제로는 잘 보이지도 않았을 얼굴이므로 그런 정도로만 기억에 남았겠지.
그리고 그 울었는지 웃었는지 모를 그때 그 순간의 진짜 아빠의 얼굴은 영원히 죽을 때까지... 알 수도 확인할 수도 없겠지.
그래서 관객들도 그 깜빡거리는 순간들의 아빠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게끔 연출한 거라고 생각한다.
성인이 된 소피에게 남은 건 아빠가 사랑한다는 것만큼은 기억하라는 마지막 카드.
함께 보낸 마지막 휴가와 마지막 춤의 기억.
아빠가 가르쳐 준 호신술과 이런저런 가르침의 말들.
비싸다고 했지만 무리해서 사서 선물해준,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카페트.
내가 찍은 것보다 아빠가 찍은 게 더 많아서, 아빠 모습은 별로 없고 나만 가득할 휴가 영상들.
그리고 애프터선크림을 발라주던 기억.
아마 아빠와 애프터 선크림(햇볕에 탄 피부에 바르는 크림)을 바르던 그 기억이 가장 애틋했기 때문에 영화의 제목이 애프터썬이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그 어렸던 소피 본인이 '아빠를 위해서 해주었던 일'이었기도 하므로. 그렇기 때문에 아빠와의 추억과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명사가 된 것일 거라고 나는 생각해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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