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자료를 다루는 직업을 가진 나는, 한 시대를 풍비하는 지식들이 때로는 얼마나 위태롭고 가변적인 것인가 종종 실감하곤 한다.
특히 한 인물이나 사건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각종의 ‘역사적 해석들’은, 이런 위험성의 보고 그 자체일 경우가 꽤나 있다.
일본 역사책 속의 일 예를 들어보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1149-1199)라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창시자’로 일본 역사책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유명인사다. 일본 역사 700여 년의 무가(武家) 시대의 서막을 연 주인공인 것이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神護寺 소장)
그의 성장 과정 중에 벌어졌던 사건에서는, 혼란했던 일본 정국의 상황이 농도 짙게 배어 나온다.
불안정한 고대 말기, 황위 계승 싸움이 벌어졌다. 그의 부친 요시토모(고시라카와 천황 편)가 조부 다메요시(스토쿠 상황 편)와 숙부 8명을 처형하고 천황의 측근으로 다이리 전상(大内裏 殿上;천황에게 직접 알현 가능한 자리)에 오르는 환란을 지켜본 것이 요리토모의 나이 10살 때였다((1156년 호겐(保元)의 난).
3년 후에는 부친 요시토모가 불만파 후지와라노 노부요부와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패하여 동국으로 도망가는 도중에 암살당하는 사건을 겪는다(1159년 헤이지(平治)의 난).
살아남은 그는 이즈 국(伊豆 国;시즈오카 현) 히루가고지마(蛭ヶ小島)라는 섬에서 20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며 성장하게 된다.
그의 인생 반전은 이즈 국 호족 호조 토키마사(北条時政)의 딸 마사코(政子)와의 만남과 결혼 속에 풀려 나갔다.
1180년 모치히토 왕(以仁王)의 영지(令旨)를 받들어 겐지(源氏) 거병의 대장으로서 관동 일대의 지배권을 잡았고, 1184년에는 동족 요시나카(義仲)를, 다음 해에는 헤이케(平家)를, 동생 요시츠네(義経)의 작전에 힘입어 멸망시켰다. 그러나 그는 동생 요시츠네를 경계하여, 그를 비호하는 오슈 후지와라씨(奥州藤原氏)로 하여금 동생을 죽이게 한 뒤, 후지와라씨도 멸망시켰다.
그가 동국(東國) 무사들의 힘을 얻어 가마쿠라에 새로운 정권을 열고, 제1대 수장, 즉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의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1192년) 사실상, 그가 '귀종(貴種)', 황족의 혈통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이와(清和) 천황의 손자 쓰네모토(経基)를 시조로 하는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적자로서의 정통성을 무사들에게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는 기존의 왕권을 부인하며 새로운 정권을 수립한 것이 아니고, 왕권과의 연결고리 속에 최고 권력의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그가 교토에 상경하여 그의 딸들을 천황과 혼인시키려 노력했던 모습들에서도 그가 누린 권력의 성격이 드러난다.
아무튼 파란만장한 53년간의 생애였으나 결국 그는 낙마(落馬) 등, 병에 패하여, 삶의 막을 내리게 된다.
이렇듯 사람은 사라졌으나, 후대의 일본 사가들은 먼지 속 기록으로부터 그를 끄집어내어 이리저리 세탁 작업을 시도하였다. 그가 ‘일본’이라는 나라에 있어서, 과거 제법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는 점 때문에, 그의 사후는 조용한 안식을 허락받지 못하고 오르락내리락 저울질당하게 된 셈이다.
일찍이 일본의 근세 사가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요리토모의 개인적 ‘야망’에 의한 행보를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요리토모가 처음 군사를 일으켰던 것은 왕을 섬기고 백성을 구하겠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헤이시(平氏)의 죄악이 넘쳐나고 천하의 호걸이 다투어 일어나는 때에 즈음하여 재기가 뛰어나고 민첩한 인물이 마침내 목적을 달성했던 것이다.”(<독사여론(讀史余論)>)
에도시대(1596-1868) 말기만 해도 대의 명분론을 강조하는 나가하라 게이지 같은 인물이 나타나, 요리토모가 '조정 권력 찬탈자'라고 비난했다.
메이지 시대(1868-1912)까지만 해도 요리토모는 황실에 반역자였는가, 공손했는가 하는 문제가 논의되며, 이러한 분위기는 2차 대전 말기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 가운데 야마지 아이잔(山路愛山)은 미나모토 요리토모를 ‘일본이 낳은 위대한 영웅’‘무사도의 화신’이라 칭송하고 나오고(<미나모토 요리토모>(1909)), 동 시기의 관학 아카데미에서도 ‘문무를 겸비한 대장’‘황실을 받든 근왕가’로 그를 장식하고 나섰다(남기학 <인물로 보는 일본 역사 3 무사정권의 창시자 미나모토 요리토모>).
이는 일본의 근대 사학, 그리고 전후 역사학까지의 분위기와 맞물린 현상이었다.
이 시기에 일본 역사상 가마쿠라 시대는 갑자기 ‘일본에서의 서구 중세의 발견’으로 재탄생했다. 일본 근대 역사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하라 가츠로(原勝郎) 같은 인물이 나타나 활동한 때이다.
마르크스 역사학에서는 무가 정권 탄생을 역사의 진보로 파악하고 요리토모가 구체제에 대해 매우 강한 보수성을 드러낸 것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근대 역사학 이래 오랫동안 가마쿠라 막부는 일본의 중세가 아시아적 정체를 벗어난 서구적인 역사발전의 경로로 전환한 ‘탈아’=‘서구’=‘진보’의 역사적 증표로 간주되었다. 이시모다 쇼(石母田正) 같은 일본 역사 세기의 학자는 중국의 토호나 열신(劣紳) 보다 뛰어난 일본 무사의 우위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본 사학계의 시각은 1970-80년대에까지 이어져 왔다.
최근에는 막부 정권을 무가 정권이 아닌 ‘무인정권’이라 표현하며, 문인 우위의 정치이념이 보편적이던 동아시아 세계에서 무인 정권의 탄생을 ‘이상(異常)’한 사건,‘동아시아의 불행한 예외’로 말하는 학자(이리마다 노부오入間田宣夫)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일본에서는 여전히 무사와 무사정권에 대한 막연한 호감에 덧붙여, 요리토모를 영웅적 인물로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남기학)
역사 서술에 있어 중요한 것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가 어떠한 색깔로 당 시대의 사가들, 언설가들에게 ‘정리당했느냐’가 사실상 더욱더 중요한 의미를 발휘했다.
이는 비단 요리토모의 예 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시대가 중요하게 다루며 논쟁하여 온 문제들은 사실상, 그 본래적 실재나, 있는 그대로의 참, 진짜와는 상당히 괴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냉철한 자성이 필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