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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Mar 05. 2021

‘도적’의 역사1

일본 고대 국가는 어떻게 패망해 갔나?


일본 고대 국가가 해결하지 못한 심각한 사회현상 중 하나에 이른바 ‘도적’의 문제가 있었다.     


<삼국지(三國志)>(3세기) 위서 동이전 왜인조(魏書 東夷伝 倭人条)에는 왜인의 풍속에 대해 

 ‘도적(盗窃)이 없’다 기술이 보인다. 

 

<수서(隋書)>왜국전 기록(6세기 말-7세기 전반)에는 

“그 풍속은 살인, 강도 및 간(姦)은 모두 사형이다. (절)도는 장물(贜物)을 계산해 돌려준다. 재산이 없으면 노비로 한다. 나머지는 경중에 따라 혹은 유죄(流) 혹은 장죄(杖)로 처리한다”하여,

 이 시기에는 ‘도(盜)’에 대해서 살인 등과 더불어 중대 범죄로 취급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8세기 이후에 편찬된 일본 고대 국가의 율령(律令) 속에는 각종의 도적 관련 법률이 넘쳐나게 된다(捕亡令 有盗賊条, 糺捉盗賊条, 賊盗律 등).      


정사의 기록을 보면 , “천하에 대사(大赦)가 내려졌다. 단지 도적은 사면의 예(赦例)에 들어가지 않는다”(<일본서기>持統5(691)年6月己未조, <속일본기>文武4(700)年8月丁卯조 등 다수)와 같이, 

도적질은 국가의 특별 사면 조치가 내려질 때조차 그 범위에서 제외되는, 즉 절대 용서받지 못할 아주 중대한 범죄로 취급되었다. 강도・절도는 8학(八虐;율에 규정된 중죄)이나 사주전(私鋳銭, 사적인 화폐 제조)과 마찬가지로 국가ㆍ왕권의 존속을 위협하는, 가장 경계해야 될, 무거운 죄형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전 시기를 통틀어 도적의 문제는 그치지 않았다.     

  “경(京) 및 제 국(諸国)에 도적이 많다. 인가를 약탈하고 혹은 해중(海中)에서 침범하여 빼앗는다. 백성을 해하는 것이 이보다 심함이 없다.…… ” (<속일본기>天平2年(730)9月庚辰 詔) 

 “듣자 하니 요즘 경 중(京中)에 도적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길가에서 약탈하고 인가에 방화를 한다. ……”(동 延暦3年(784) 10月 勅)     


문제는 궁(宮)의 중심부까지도 도적의 표적 속에 있었다는 점이다.     

“야밤에 도적이 구라료(内蔵療;궁중의 재보, 천황, 황후용 장식물 등 담당)에 침입했으나 눈치챈 사람들이 이를 둘러쌌다. 그러나 다이죠사이(大嘗祭;천황 즉위 후 최초의 신상제(수확을 축하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가까이 둔 때라 자살이라도 할까 봐 조심해서 사자를 파견해 설득했기 때문에 도적은 암흑을 이용해 사라졌다.”(<일본 후기>大同3(808)年11月4日条) 

    

“야간에 오쿠라쇼(大蔵省;공물의 보관, 출납 등 담당)를 순회, 경비하던 도네리(舎人)가 건물로부터 연기가 나는 것을 발견하고, ‘불이다’라고 외쳤다.……타오르는 것을 두들겨 끄면서 물건을 훔쳐내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붙잡아 보니까 우바소크(優婆塞;재가 여승)3명과 구라베(蔵部) 1명으로, 우바소크 1명의 자백에 의하면, 소동이 일어난 틈에 물건을 훔치려고 불을 붙인 것으로 지난 20일 밤의 실화(失火)도 그들의 방화였다고 한다.”(<일본후기>逸文, 弘仁14(823)年11月22日).    

 

“여자 도둑 2명이 세이료덴(清涼殿;천황 일상 거주지)에 몰래 침입했다. 천황은 놀라서 구로우도(蔵人)등에게 명하여 당직의 에후 도네리(衛府舎人)을 불러 체포시켰으나, 한 사람은 체포, 한 사람은 도망갔다.”(<속일본후기>承和4(837)年12月5日)     


궁의 중심, 천황의 거주지조차 도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3일 전에도 도둑이 "다이리(内裏;천황의 거주 궁전) 안의 슌코덴(春興殿) 문을 열고 견(絹) 50 필 이상을 훔쳐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 헤이안(平安) 시대를 통해 이처럼 천황의 거소에 도적이 침입한 예는 그 밖에도 많다(<紫式部日記>寛弘5(1008)12月30日의 강도사건 등). 


이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일로 에후(衛府) 특히 근위(近衛)의 간부나 다키구치노 부시(滝口の武士)들을 엄하게 경비 책임을 문책하였다든지, 처벌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천황의 신변 안전을 염려한다든지, 조정 권위가 실추되었음이 문제시되었다 라든지 하는 등의 논의가 있었다는 흔적도 없다.     


특히나 시간이 갈수록 집단화된 군도(群盜)들은 조정의 크나큰 골칫거리였다.

때로는 수십 명이, 혹은 백여 명 이상의 무리들이 떼를 지어 지역의 장관을 살해하는 사건이 연이었다(<일본삼대실록>元慶7(883)年2月9日,7月19日 등).

조정은 그 관리 책임자를 문책하고 해임 조치 하기도 하였으나, 그리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이 무렵의 도적들은 당시의 분석에 의하면, 

1. 양가(良家)의 자제나 귀족의 종자 등, 편호(編戸)의 민(民)을 형성하지 않은 자가 연대하여 집단화한 것, 

2. 기근, 추위에 시달려― 반드시 흉악한 마음을 가지고는 있지 않은 경우, 등이라 보고 있다.

(<藤原保則伝>)     


도적 집단의 횡행은, 도적 엄단을 외치면서도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었던 국가와, 생존이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할 바른 방법을 가지지 못했던 민중들이 공존하며 살았던 시대의 모습이었다. 

이 문제를 풀어내지 못한 고대 정부는 결국 패망에 이르게 된다.     




이후 일본의 무가 시대에 횡행한 산적, 도적 등의 이른바 ‘악토(악당 悪党)’의 무리들, 

바다로 쏟아져 나가, 한반도의 삼국 시대에서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침탈을 행한 '왜구(倭冦)'의 무리들. 

일본 중앙 정부의 치정력 허약을 틈새 삼아, 방화와 약탈을 일삼던 ‘도적’의 긴 역사가 있었음이다.



중세 악토(悪党)에 의한 방화와 약탈(四天王寺 소장)
중세 악토의 횡포(『春日権現験記絵』模本, 東京国立博物館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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