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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탄 Oct 04. 2019

어른이라 아이보다 나은 점

오늘의 행인1 : 과자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



우리는 예로부터 나이가 들면 경륜이 많아지고 지혜가 쌓여서 나이가 덜 든 사람보다 뭐 하나쯤 나은 게 있을 거라 기대해왔다. 그래서 어른 말을 들으면 무려 자다가 공짜 떡이 생긴다는 속담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나이 경륜과 지혜와 더 나음을 만들어줄 거라는 그 일반적인 기대에 동의할 수가 없다. 지혜로운 어른이 있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 어른이 지혜로운 건 나이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이가 든다 해도 젊은이보다, 아이보다 낫지 못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좋아하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옛사람들에게는 옛 행위가 있고, 새 사람들에게는 새 행위가 있다. 옛사람들은 새로운 연료로 불을 지피는 방법을 몰랐지만, 새 시대의 사람들은 솔 밑에 마른나무 몇 쪽을 태워서 새처럼 빠르게, 그야말로 노인네들을 치어 죽일 만큼 빠른 속도로 지구를 도는 것이다.
나이 많음이 젊음보다도 더 나은 선생이 될 수 없고 ...(중략)... 실제로 늙은이들은 젊은이들에게 줄 만한 중요한 충고의 말을 갖지 못하고 있다.


나이는, 세월은, 아무것도 만들어주지 못한다. 나이가 드는 동안 어떤 노력을 했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니 고작 '나이 든' 어른이라는 이유로 아이보다 나을 거라는 기대는 잘못됐다. 8년짜리의 노력이 80년짜리의 노력보다 나을지도 모르는 거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34년짜리 내 노력은 어땠나 아찔해 온다. 어쩌다가 빼박 어른인 나이가 돼버렸는데 난 뭐 하나라도 좀 나은 게 있으려나. 어디 보자. 찾아보자. 어... 뭐라도 있을 텐데? 음...... 하.....


당이 당긴다. 편의점이나 가야지.


오랜만에 과자를 먹으려니 고르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새우 맛, 꽃게 맛, 바나나 맛, 치즈 맛, 감자 맛. 입에 넣었을 때의 자극적인 맛의 향수를 최대한 기억해내며, 뭘 고르는 게 최선일지 고민하느라 과자들 앞에 한참을 서 있는다.

고민이 길어질 땐 하나씩 탈락시키는 방법이 효율적이라고 배웠다. 시간이 없으니 효율적으로 처리해보자. 단 건 질리니까 바나나 맛 탈락. 치즈 맛은 과자보단 다른 거로 먹는 게 나아서 탈락. 꽃게보단 새우지. 꽃게 탈락. 남은 건 새우 맛과 감자 맛. 역시 과자도 오래된 게 최고다. 둘 중 뭘 사야 하지. 둘 다 사버려?


과자 두 개를 집어 들고 마지막 고민을 하는데, 옆에서 꼬마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 저거 살래.”


내가 들고 있는 과자 중 하나를 가리킨다. 어쭈. 맛 좀 아는 친구네. 같은 입맛을 가진 아이를 만나 반가우려는 찰나, 모퉁이에서 아이 엄마의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안 돼. 하나만 사기로 했잖아.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거 안 살 거야? 안 살 거면 저거 사고. 하나만 골라.


과자 두 개를 들고 있는 내 손이 무안해지는 순간이다. 나한테 한 말은 아닌데 내 오금이 저리는 건 왜지. 아, 하나만 골라, 라는 말. 저만할 때 나도 엄마한테 많이 듣던 말이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필요 이상의 물건을 사지 않도록 교육했 과자는 얄짤없이 하나를 골라야 했다. 뭘 골라야 할지 몰라 둘 다 쥐고 있으면, 하나만 선택할 때까지 지독히도 기다렸다.

상황이 이러니 그 시절 어린이날마다 선물로 유행했던 <종합과자선물세트>는 꿈도 못 꿨다. 지금 생각하니 별로 비싼 것도 아니었는데 한 번도 안 사줄 건 또 모르겠.

여튼 그때는 '이래서 돈을 벌어야 하나 보다' 생각했다. 나중에 돈 버는 어른이 되면 저런 과자 박스를 몇 통이고 사두고 먹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내 돈 주고 과자 박스를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경제활동을 하는 어른이 되었다. 나한테 하는 말도 아닌데 괜히 혼자 뜨끔하던 저 엄마의 말에 당당히 대응하듯, 나는 손에 쥔 과자 두 개를 다! 계산대에 올다. 시원한 탄산수 하나도 같이!

아이는 결국 원래 쥐고 있던 과자 하나만 가져와 내가 사는 과자를 부러운 시선으로 다. 


(마! 이게 어른이다. 넌 엄마가 사주니까 엄마 말 들어야 하지? 난 내 돈 주고 먹고 싶은 거 다 사 먹는다!)


눈으로 자랑질을 해본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생각하던 거 하나 찾았네. 내가 나이 덜 먹은 아이들보다 나은 점. 먹고 싶은 걸 당당하게 먹고 싶은 만큼 살 수 있다! 약간 '돈이 최고'류의 결론 같아 좀 찝찝하지만 어쨌든 하나라도 찾은 게 중요하니까. 뿌듯하게 돌아와 과자를 뜯는다.



* 과자 두 봉 구입 후기(반전 주의)

두 개를 사 왔지만 역시나 많이 먹히지 않아 한 봉은 뜯지도 않았다. 그리고 살짝 후회가 된다. 하나만 살걸… 물론 두고 나중에 먹어도 되지만, 엄마의 교육효과 덕분인지 난 집에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쌓여있는 걸 싫어다. 역시 다음부턴 그냥 하나만 사야겠다. 

근데 이러면 결국 아까 그 아이랑 같아지는 건가. 내가 아이보다 나은 점 찾기는 다시 원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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