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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자 Sep 18. 2023

아이를 낳은 다음날, 나는 목놓아 울었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한 달 정도 됐을 무렵 둘째를 낳았다. 사람들이 말하길 둘째는 예정일보다 빨리 나오고 낳기도 수월하다고 해서 마음을 놓고 있었다. 하지만 일곱 살 터울인지라 초산이나 다름없는 진통을 겪으며 두 번째 아기 천사를 만나게 되었다.


 아이를 무사히 낳은 후 아픔보다는 서러움이 밀려왔다. 우린 양가 부모님 모두 지방 멀리 계셔서 내가 출산하는 동안 첫째를 케어해 줄 사람이 없었다. 육아를 하면서 부모님께 가능하면 부탁하지 않고자 하는 게 남편과 내가 세운 원칙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번 출산 시에도 오롯이 우리 힘으로 하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집에서 첫째를 케어해야 했고, 나는 밤새 홀로 엄청난 진통을 버티다가 다음날 아침 출산이 임박해진 때에야 비로소 급히 남편을 호출했다. 남편은 등교해야 하는 첫째 아이와 함께 급히 병원으로 왔고, 첫째를 문 밖에 앉혀 놓은 채 분만실로 들어와 겨우 탯줄을 자를 수 있었다.


 병실에서 불을 끄고 숨죽여 울고 있다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 목이 매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울지 말라며 애썼다고 말씀하시는 엄마의 목소리에서 평소 엄마의 감정과 반응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생각해 보니 아기를 낳고 나서 아빠와 통화한 기억이 없었다. 분명 아빠가 무척이나 좋아하시면서 나에게 전화를 하시던지 엄마에게 바꿔달라고 하셨을 텐데... 뭔지 모를 불안감이 찾아왔다.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봐도 다른 가족 모두 모르겠다며 내 물음을 피하는 느낌이 들었다. 


 곧바로 아빠에게 전화를 해보고 싶었지만 불안한 마음이 혹시나 현실이 돼버릴까 봐 선뜻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빠에게 아기사진을 담아 문자를 보냈다.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문자는 계속 '읽지 않음' 상태로 남아 있었다. 분명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이튿날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빠를 바꿔달라고 하자 엄마는 아빠가 잠깐 외출하셨다면서 바꿔주지 않으셨다. 분명 나에게 무언가 숨기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용기를 내어 아빠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아빠의 목소리가 어서 들리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다렸다. 전화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더 불안해져만 갔다. 


 한참을 받지 않아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연결이 되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아빠가 아닌 바로 엄마였다. 엄마는 얼떨결에 전화를 받으셨는지 얼버무리시면서 아빠한테 다시 전화하라고 말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가라앉아 있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무슨 일이 생기고 말았음을 직감하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에게 답을 들을 수 없자 다시 떨리는 마음으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에게 혹시 무슨 일 있으신지 어디 아프신 건 아닌지 묻는 나에게 언니는 울먹이며 말했다. 아빠께서 머리를 다치셨다고... 출산이 임박했던 나에게 가족들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께서는 농사일을 하기 위해 트랙터에 오르다가 낙상을 하셔서 외상성뇌출혈로 급히 중환자실로 옮겨지셨다고 했다. 간호하고 있던 언니에게 아빠는 존댓말을 하며 못 알아보더라는 언니의 말에 나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새 생명의 탄생 속에 축하받기 바빠야 할 산모였지만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목놓아 울었다.


 할아버지의 눈을 닮은 귀여운 손자가 태어난 날, 할아버지는 손자가 태어난 줄도 모르고 과거 어딘가를 헤매고 계신 걸까.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아려왔다. 


 조리원에 있는 동안 나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빠의 증상들을 전해 들을 때마다 그것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찾아보며 늦은 새벽까지 뜬눈으로 보냈다. 사랑하는 아기와 함께하는 모자동실 시간에도 그 고운 얼굴이 내 눈물로 흐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기를 위해 미역국을 꾸역꾸역 삼켜내며 버텼다.


 창밖으로 보이는 화창한 봄의 날들은 흘러갔다. 아기는 하루 이틀 지날수록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려운 살림에 우리 4남매를 키우기 위해 평생 농사일로 고생만 하셨던 아빠를 우리는 절대 놓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우리 가족의 간절함이 닿았는지 아빠께서는 호전되어 드디어 가족들을 알아보시게 되었다. 


 언니가 전화로 아빠를 연결해 주었다. 휴대폰 너머로 아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울음이 내 목을 꽉 매어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저 셋째 딸이에요, 목소리 잘 들리죠? 아빠가 기다리던 막둥이 손주가 태어났어요!" 아빠께서는 무슨 아기가 태어났냐며 되뇌기만 하셨다. 하지만 난 그것이면 족했다. 아빠가 셋째 딸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것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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