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처음 본 활화산의 전경
100개 도시 여행을 다녀와서 사람들을 만나면 꼭 듣게 되는 질문이 있다.
처음에는 어느 곳을 대답해야 할 지 몰랐는데, 시간이 점차 지나고 지금에서야 어디가 가장 좋았는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의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또렷히 기억에 남는 여행지, 그곳이 아마 가장 좋았던 도시가 아니었을까 싶다. 여행지로 쉽게 떠올리기에는 생소한 국가일 수 있는 인도네시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도시는 '발리'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유명한 관광지보다, 숨어있는 소도시에서 진정한 자연의 경이로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를 가장 아름다웠던 국가로 꼽는 가장 큰 이유는 '활화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백두산, 한라산 정도의 휴화산이 있긴 하지만, 살아있는 화산을 실제로 보는 느낌은 휴화산의 풍경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특별했다. '활화산'이라는 것을 처음봤을 때의 그 경이로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삭막함과 광활함 그리고 활화산이 만들어내는 지형의 오묘함까지, 특히 수라바야의 브로모화산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동은 여행이 끝난 지금에도 활화산이라는 이름처럼 생생하게 살아있다.
낯선 도시 수라바야이지만 인도네시아 제 2의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굉장히 큰 도시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의 느낌을 가진 도시가 아닐까? 그러나 아직은 낯설기만 한 도시 수라바야에서 우리는 어떤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우리나라 여행 사이트에는 수라바야 지역을 치면 나오는 투어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럴 때 우리의 솔루션은 구글! 구글에서 'Surabaya trip'을 검색하면 나오는 투어는 단 하나, 브로모화산 투어였다. 가격은 한화로 인당 65,000원(750,000IDR)이었다. 예약하기 전에 고민이 많았다. 왜냐하면 베트남에서 출발해서 밤 10시 쯤 수라바야에 도착하는데 일정 상 브로모화산 투어를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짐만 내려두고 출발해야 수라바야에 있는 기간 내에 투어를 무사히 마치고 다음 도시로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브로모 화산 사진을 본 후 이미 넋이 나가서 '여긴 꼭 가야해'를 주장하고 있던 터라, 맏언니의 권력 아래 모두를 설득했다. 아침에 베트남에서 출발해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를 경유하여 드디어 밤 10시에 수라바야 공항에 도착했다. 브로모투어 업체에서 공항으로 우리를 픽업나오기로 했었는데, 인도네시아 유심도 없는 상태여서 가이드를 제대로 만날 수 있을지 걱정 한 가득이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문이 딱 열리고 공항 밖으로 나가는데 미스터 밤방(Mr.Bambang)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빈도 울고 갈 도전적인 장발을 소유하고 있었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그를 보며 치우는 나랑 닮았다고 놀리기 시작했다.
그는 굉장히 선하고 착하고 웃는 모습이 밝은 사람이었다. 다행히 좋은 가이드를 만나 짐을 재빠르게 호텔에 가져다 둔 후 자정 즈음 투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수라바야에서 브로모 화산까지 편도 3시간 길을 이동했고, 브로모 화산을 배경으로한 일출을 보기 위해 인근에 있는 언덕으로 향했다. 언덕이라고 칭하지만 고도가 높고 산길이 험해서 사륜구동 집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도착해보니 이미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수라바야를 검색하다가 알게 되었지만,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유명한 관광지인 것 같았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이 새벽에 이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리다니... 사람들이 많은 만큼 내 기대도 커졌다.
얼마나 아름다운 뷰이길래!
그러나 문제점이 있었다. 고도가 높아서 이러다가 동사할 수도 있다는 위협감이 들정도로 추웠다. 여름 계절의 국가만 다녔기 때문에 따뜻한 옷도 없을 뿐더라 긴바지 챙겨입는다고 챙겨입은 것도 선풍기 바지여서 바람이 불 수록 더 추웠다. 생명의 위협을 못참고 털모자와 장갑을 샀다. 고백아시아 여행에서 털모자를 쓸 정도로 추운 곳에 오다니... 어쩌면 너무 추워서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브로모화산을 잊을 수 없는 것일 수도 있겠다. 너무 추운나머지 가격비교도 안해보고 앞에 있던 판매상에게 냉큼 한화 1,600원 (20,000IDR)에 털모자를 구매했는데, 조금 더 올라가보니 2배나 바가지 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뭐.. 그 때 안 샀으면 얼어 죽었을 수 있으니 생명 수당으로 더 얹어줬다고 생각해야지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혹한을 뚫고 난간에 매달려 기다린 일출은 기대만큼 아름다웠다. 불타오르는 빨간 해가 떠오르는 모습, 새벽부터 춥다고 다들 손을 호호 불며 이 자리에 나와있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해가 다 뜬 후에 내려오려고 여기 저기 둘러보는데 소영이가 보이지 않았다. 먼저 내려갔는지 싶어서 "소영아 어딨니?"를 외치며 길을 내려가는데, 길 옆 찻집에서 오들오들 떨며 찻잔을 붙잡고 있는 소영이가 보였다.
'언니... 살려줘...너무 추워...'
너무 추워서 일출도 못보고 내려와서 몸을 녹이려고 생강차를 마시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소영이 머리에도 나랑 똑같은 털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솔직히 활화산이라고 해서 뜨겁고 더울 줄 알았는데, 용암이 뜨거울 뿐 고도가 높은 곳은 다 춥다는 진리를 몸으로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집차를 타고 브로모 화산 쪽으로 향했다. 화산과 화산 사이, 집차를 타고 달리는데 일어나는 화산재와 모래 바람이 영화 속 카우보이 씬에나 등장할 듯한 장면을 실제로 보는 느낌이었다. 집차에서 내려서 보이는 활화산의 전경은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보거나 상상하지 못했던 풍경을 담아내고 있었다. 브로모화산 앞까지 말을 타고 갔다. 트렉킹이라면 정말 힘들었을텐데, 내 힘을 들이지 않고 이렇게 이색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온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활화산 바로 앞에서는 계단을 직접 올라가야 한다. 화산 봉우리에서 용암 분화구를 들여다볼 수 있다. 연기가 나고 계란 썩은 유황냄새가 올라온다. 분화구는 깊디 깊은 암흑같이 끝없어 보인다.
아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활화산이구나.
난생 실제로는 처음보는 '활화산'이라는 전경과 화산 꼭대기에서 느꼈던 색다른 오각은 브로모화산을 100개 도시 중 최고의 여행지로 손꼽을 수 있게 만들었다. 브로모화산 뿐 만아니라 인도네시아에는 숨겨진 보물같은 여행지들이 정말 많다. 그러나 우리가 인도네시아의 아름다움을 잘 모르는 이유는 인도네시아 국가 자체가 워낙 자원이 풍부한 나라이기 때문에 굳이 관광산업에 힘을 쏟지 않기 때문이 큰 것같다. 그냥 모르고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까울만큼 인도네시아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브로모화산 말고 갔던 또 하나의 활화산은 발리 인근에 있는 '이젠화산(Mt.Ijen)'이다. 발리 여행은 익숙해도 이젠화산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봤을 수 있다. 왜냐하면 발리는 휴양하러 가는 곳이고, 이젠화산은 고생하러 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행가서 이젠화산을 간다는 것은 함께 여행하는 지인이 힘든 여행 매니아가 아니고서는 갈라설 각오를 해야하는 급이다. 이젠화산의 특별한 점은 우리가 아는 빨간 불꽃과는 달리 불이 파랗게 타오르는 전세계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블루파이어(Blue Fire)는 날씨가 따라준다면 최대 5M까지 솟구친다고 한다. 그러나 이색적인 풍경인 만큼 보러가는 길은 정말 험난했다.
이젠 화산 투어 가이드가 발리 공항으로 픽업을 왔다. 차를 타고 짐을 숙소에 둔 후 이번에는 이젠 화산으로 출발한다. 브로모에 이어 비행기 타는 이동날이고 뭐고 상관없이, 청춘은 체력이다라는 일념으로 빡센 행군을 감행했다. 차를 타고 편도 5시간을 걸려 항구에 도착해서 페리를 타고 1시간을 또 들어간다. 칠흑같은 밤, 이제부터 이젠화산 투어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브로모와는 다르게 갑자기 마스크와 랜턴을 나누어 준다. 마...스크..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미세먼지 마스크가 아니라 방독면 마스크 같은 것을 나누어 주었다. '여기 이런 곳이었어?' 브로모화산 쯤으로 생각하던 나의 가벼운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마스크를 끼니 마치 프리데터 같았다. 그리고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정말 운동의 '운'도 안하는 나인데, 트렉킹도 이렇게 험난한 트렉킹을 해본적이 없는데 생각없이 올라가보려고 하지만 내 심장이 쥐어짜듯 아파오고 땀은 빗물처럼 흘렀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옆에 수레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가이드에게 물어봤더니 다리가 아파서 오르기 힘든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돈을 4배 쯤 더 주고 수레를 타고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수레를 앞에서는 끌고 밑에서는 미는 4명의 꾼들이 있었다. 아니 굳이 저렇게 해서까지 몸도 안좋은데 올라가고 싶으실까라는 생각과 더불어 내 한몸 걸어가기도 이렇게 땀이 비오듯 힘든데 수레 뒤에서 밀고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라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솔직히는 돈만 있었다면 타고 싶었지만, 아껴써야하는 배낭여행객인 나는 내 한 몸 그냥 바치겠다는 심정으로 랜턴이 가리키는 빛만 바라보며 꾸역 꾸역 올라갔다. 올라가는데 옆에 40kg가량 되는 짐지게를 메고 있는 사람들도 지나다녔다. 물어보니 유황을 나르는 일꾼들이라고 했다. 유황이 덩어리째로 여기 저기 있는데 이러한 모습도 이젠화산에서만 볼 수 있었던 독특한 광경이었다. 얼마나 올라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중간에 있는 쉼터에 도착했다. 영상찍으려고 카메라를 켰는데 꼴이 말이 아니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추노꾼의 모습 딱 그대로 였다.
계속 머물고 싶었으나 이제는 우리가 다시 움직여야 할 때였다. 중간 이후로는 비포장지대로 돌무데기의 연속이였고 분화구로 향하는 비좁은 내리막 길에도 난간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발끝에 힘을 빡 주고 걸어야 죽지않겠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 와중에 유황냄새가 거칠게 올라왔다. 브로모 때는 마스크도 안꼈는데, 이젠화산은 진짜 헬이란 이런 것인가. 지옥은 이것보다 더 고통스럽겠지 싶은 수준으로 숨도 못쉬어질 만큼 썩은 계란 냄새가 몰려들어왔다. 마스크 없이는 절대 갈 수 없는 장소임이 분명했다. 블루파이어가 이러한 고통을 감내해야 할 만큼 가치있는 것인가라는 고민과 함께 더욱 놀라운 풍경을 보게 되었다. 나는 한 발 한 발 딛는 순간이 낭떨어지의 생죽음과 오가는 기로이기에 굉장히 조심스레 딛고 있었는데, 유황지게 매고 지나다니시는 아저씨들은 맨발에 쪼리를 신고 이 길을 오가시고 계셨다.
그들만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는 저걸 저렇게 해낼 수 없는 것인데... 그러면서도 우리가 사진찍으려고 하면 미소를 지어주시는 아저씨들이 고맙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가이드에게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 지게꾼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오늘 날씨가 살짝 축축해서 블루파이어가 없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네.....? 그거 보려고 이런 생고생을 하고 있는건데요...?" 일단은 분화구 밑으로 내려가보자는 가이드의 말에 정말 간곡히 기도했다. '블루파이어 보여주세요!! 제발요!!'
밑에 내려가보니 굉장히 작은 파란 불꽃이 일어나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실망하긴 했지만, 못볼 수도 있었는데 본게 어디인지 감사할 따름이었다. 우리가 사진을 찍은 후에, 그 지역을 관리 감독하는 사람이 이내 불꽃을 끄고 갔다. 파란 불꽃이 유황하고 만나면 유독가스가 될 수 있어서 최대한 바로바로 끈다는 이야기를 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둠이 점차 사라지고 해가 뜨고 있었다. 브로모화산이 여성적 느낌의 활화산이라면 이젠화산은 남성적 느낌의 활화산이었다. 여기 저기 돌 사이로 유황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마치 전쟁의 폐허 느낌도 들었고 백두산 천지처럼 고여있는 칼데라의 옥색 빛도 회색 느낌의 지형과 어우러져 있었다. 폐허같으나 그 폐허마저도 자연의 경이로움을 뿜어내고 있었고, 여기 저기 뿜어져 나오는 연기에서 '전 아직 살아있어요'라고 외치는 활화산의 메아리같았다.
블루파이어를 보고 올라오는 길이 더 지옥같았다. 유황냄새는 거침없이 밀려들어오기에 마스크를 꼭 착용해야했고 마스크를 착용하니까 산소유입율이 낮아졌다. 그러나 오르막 길이기에 내 숨은 더 가파르게 차왔고 더 많은 산소를 필요로 했다.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을 때처럼, 부족한 산소로 인해 나는 주저앉아서 거의 기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보이는 풍경은 왜 또 이리 예쁜지. 눈에 보이는 것은 천국인데, 내 몸이 느끼는 고통은 지옥이었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겨우 겨우 내딛고 있는데, 어떤 인도네시아 여자 아이들이 말을 걸었다. "엑소, 엑소, 백현 사랑해요, 수호 수호 좋아" 이런 상황과 환경에서도 케이팝 문화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고, 짧지만 그 한국어를 말한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또다른 인도네시아 남자 아이들은 블랙핑크 얘기를 하면서 뚜두뚜두 노래를 인도네시아 버전으로 불러주었다. 비록 다리는 다 풀려서 몸은 너덜너덜해졌지만 현지 사람들과 이렇게 문화라는 주제로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즐거울 따름이었다.
이미 9개월 치가 확정되어 있는 우리의 엄청난 이동 스케줄 속에 축제나 이벤트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그런데 정말 운명처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전인 '한일전'을 하는 그 날 자카르타에 도착했다. 사실 그 전에 딩고 촬영 일정 때문에 스케줄이 한 번 엎어지고 재라인업 된 시기가 있었다. 그래서 태국 끄라비도 2번 방문하는 것으로 바뀌고 말이다. 이러한 복잡스러운 일정 변경 속에 의도치 않게 한일전 직관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되었다. 더욱이 티켓가격도 인당 3만원으로 생각보다 엄청 저렴해서 이 경기를 보는 것은 운명이라고 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보러가는 길은 역시 험했다. 뭐하나 쉬운 것, 쉽게 얻어지는 것은 없다.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렙택시를 붙잡아 경기장으로 향했다. 원래는 1시간 걸리는 길이지만 이 경기를 보러 달려가는 인파로 인해 2시간 30분이 걸려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멀리서 부터 들리는 응원소리는 내 가슴을 뛰게하기 충분했다. 무려 아시안게임 한일전을, 그것도 결승전을 직접 두 눈으로 직관할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아저씨 제발 빨리 달려주세요.' 그러나 마음처럼 차들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운동장 근처에 도착해서는 그냥 돈을 내고 나와서 경기장 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미 경기는 시작한 뒤여서 마음이 더 조급했다. 한국 쪽 좌석이 이미 꽉차서 일본 쪽으로 가라는 안내를 받았다. 사실 자리는 나름 좋은 곳 앉았지만 응원하는데 매우 눈치가 보였다. 주변에 다 파란 옷 입은 일본인 들이 "니~~~뽄 니~~~뽄" 하고 있는데 우리만 강력히 그 속에서 빨간 옷을 입고 "대~한민국"을 외쳤다. 골 2개가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기쁜 탄성을 내뱉었다. 직관 경기는 처음 보는데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과 짜릿함은 엄청났다. 그러나 경기가 끝남과 동시에 과연 우리가 숙소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 밀려들어왔다. 분명히 이 경기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렙택시를 부를테고, 공급량은 많지 않기 때문에 먼저 나가서 잡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시골에서 밤을 샐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난간에서 매달려서 금메달을 수여받는 선수들을 보고 있는 고백친구들을 끌고 나오려는데, "인생 뭐있어? 끝까지 보자.. 이런 기회 흔치 않잖아"라는 치우의 한 마디에, 매사 걱정 투성이였던 성격으로 인해 많은 것들을 주저하고 누리지 못했던 내 자신이 보였다.
"그래, 뭐 있니 끝까지 보자, 그게 여행이지"
사실 금메달 수여까지 보고 나섰기 때문에 정말 못돌아갈 위기에 처하긴 했었지만, 결국은 기사를 구해서 자카르타 시내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서로 각기 다른 네명의 사람이 여행을 다닌다는 것, 참 어려운 일은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기존에 살아가던 방식에서 벗어나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조금 더 행복해지는 방법을 배운 것 같다. 항상 미래에 대한 걱정을 탈피하기 위해 새벽 5시부터 밤 12시까지 시간 대별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계획을 세우고 살아갔던 나에게, 고백친구들과의 여행은 계획없이 움직여보고 마음내키는 대로 즉흥적으로 살아볼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숙박도 여행지 도착해서 찾아볼 때도 있었고, 미리 계획하지 않고 떠나는 즉흥성에서 발견했던 여유로움과 즐거움이 있었다. 처음이 어려운 것이지 몇 번 해보고 나니까 '행복해지자'라는 합리화 속에서 나를 조금은 자유롭게 풀어주게 되었다. 경쟁에 경쟁을 거듭하는 한국사회 속에서 누군가보다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달려가던 나에게 '브레이크'가 되었던 합숙 훈련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한국이 좋다. 한국 사회도 좋다. 그러나 안 그러려고 그래도 한국에 있으면 자꾸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게 된다. 미국에서도 살아보고 프랑스에서도 살아봤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했던 서양의 문화에서는 행복을 상대값이 아닌 절대값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한국에만 오면 다시 비교하게 되고 그러면서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자괴감을 느끼게 되고 행복이 상대값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슬퍼진다. 비교하지 않는 것이 불행의 끝이고, 감사하는 것이 행복의 시작인데 유교적 문화권 안에서의 정서 때문인지 쉽게 바뀌지는 않는 것 같다. 오늘도 의식적으로 나의 생각의 방향을 돌리고 또 돌리려고 노력한다.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
요즘 소위 뜬다고 하는 추천 여행지인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 배틀트립, 아날로그 트립 같은 방송에도 여러번 방영되면서 핫플레이스가 되어가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아직은 정보가 많지 않아서 나에게도 여행정보를 공유해달라는 DM이 날라오곤 하는데, 친구가 여행지 추천해달라고 하길래 욕야카르타를 말했더니 "거참, 이름 한 번 시원하네 ㅋㅋㅋ"라는 답변이 날라왔다. 이름이 약간 욕하는 것 같기도 한데, '욕야카르타'가 공식 명칭이며 발음의 편의성 상 '족자카르타'라고도 불리운다. 썽으니피셜 아시아 3대 석양 중 하나를 볼 수있는 여행지이며, 바다는 아니지만 숲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자연만으로도 일정을 가득 채우기 빠듯한 곳이다.
▣ 욕야카르타에서 꼭 가야할 여행지 TOP4
1. 빠랑뜨리티스 해변
나의 최애 바닷가 중에 하나이다. 아마도 화산재로 인해 모래가 검은색이 되었던 것 같다. 아직 개발이 덜 되어 건물이 없이 자연 해변이 쭉 펼쳐지는데, 대형 거울을 가져다 놓은 듯하다. 붉은 노을이 바다에 비칠 때, 그리고 마차가 그 사이를 지나갈 때 인생 선셋을 만날 수 있다.
2. 좀블랑 동굴
아저씨가 내려주는 수동 동앗줄에 대롱 대롱 매달려서 60M나 내려가야 동굴로 가는 길이 나오는데, Safe?(안전해요?)라고 물었더니 시크하게 Maybe(아마도)라고 대답하는 아저씨를 보면 동앗줄타기가 더욱 스릴이 있게 느껴진다.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줄을 끌어당기고 내리는데 우리의 목숨을 맡겨본다. 동굴을 따라 질퍽 질퍽한 진흙길을 지나다보면 천사의 빛을 만날 수 있는데, 한 줄기 한 줄기 빛 줄기가 선명하게 보여 그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곳이다.
3. 사막보딩
처음 타는 보드를 사막에서 탈 수 있다니 신기했다. 이색적인 액티비티여서 만족했으나 뜨거운 광선 아래 모래가 다 익은 후라 발이 굉장히 뜨거웠다. 내려가는 부분은 재밌지만 데일 정도로 뜨거운 모래를 밟으면서 다시 올라오는 길은 좀 힘들었다.
4. 소나무 숲
데이트 코스로 손꼽히는 곳으로 인증샷을 찍을 만한 풍경이 한 가득이다. 산림욕도 즐기면서 추억도 남길 수 있어서 가볍게 방문하기 좋다.
4. 보로부두르 사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미얀바 바간을 잇는 세계 3대 불교 유적지 중 하나이다. 단일 규모로서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 유적지다.
메단에 오면 꼭 들려야한다는 토바호수. 전체 면적이 약 1,000제곱킬로미터인 동남아시아 최대의 호수이며 화산 폭발로 인해 생긴 칼데라이다. (*칼데라=백두산 천지처럼 화산 폭발 후 물이 고이는 현상으로 생긴 호수) 무려 백두산 천지의 141배에 달한다고 하며 이 칼데라 안에는 싱가포르보다 큰 사모시르 섬이 있다. 사모시르 섬 내에 있는 툭툭마을(Village TukTuk)에 갔다.
평화롭고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토바호수의 최대 장점은 혼자 사색해도 시간가는 줄 모른다는 점이다. 마치 동화 속 마을에서 자연과 내가 대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서 멍하니 앉아 자연만 바라보며 일주일 쉬면 좋을 것 같은 그런 여행지였다. 첫 날부터 시작해서 툭툭마을에 있는 3일 동안 연속으로 총 3번 방문한 단골 맛집이 있었다. 바로 Bamboo's Cafe. 인테리어도 예쁘고 비프 시즐러도 굉장히 맛있었고 앉아있으면 보이는 창 밖의 풍경도 폭포와 야자수 푸르른 호수가 어우러져 말도 안되는 뷰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만 앉아있으면 안되고 구경을 다녀야지라는 생각에 숙소에서 오토바이 2대를 빌렸다. 그리고 뷰포인트로 향했다. 나와 치우가 선두를 서서 길을 달려가는데, 어느 순간부터 보준이와 소영이가 탄 오토바이가 뒤따라오질 않았다. 계속 뒤를 봐도 따라오지 않는 상황이 이상해서 방향을 틀어 다시 되돌아갔는데, 보준이와 소영이가 오토바이를 멈춰 세워두고 난감해하고 있었다. 오토바이 뒷바퀴 타이어가 빠져버렸던 것이다. 또한 산 위라 통신이 안 터져서 우리에게 연락도 못하던 중이었다. 비수기라서 공기압체크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고, 나와 치우는 그대로 숙소로 돌아가서 숙소 주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마치 이런 일이 많이 있어본 듯한 숙련함과 특유의 느긋함으로 우리를 진정시킨 뒤 사고 지점으로 향했다. 보준이와 소영이의 말로는 그 오토바이를 끌고 인근 마을 수리공에게 가서 바로 고쳤다고 한다. 결국 뷰포인트에서 선셋은 보지 못했지만, 아무도 안다치고 큰 사고도 안났으니 그것만 해도 천만 다행일 뿐이었다. 오토바이를 타다가 갑자기 좌우로 심하게 흔들려서 넘어질 뻔 했으니 놀란 것은 사실이지만, 왠만큼 동남아시아에서 살다보니 안전 점검 의식이 낮다는 것을 알았기에 다치지 않은 이상 큰 컴플레인은 하지 않았다. 안전한 여행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것 뿐이다.
툭툭마을에 오기 전에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툭툭마을이 식인 부족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기독교 마을이라는 이야기도 들었기 때문이다. 이슬람이 87%에 달하는 복음의 불모지인 인도네시아에서, 툭툭마을에 살고있는 바탁족은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들이 식인 부족이었다는 말은 무엇일까? 그래서 살짝 친해진 숙소 주인 아들 대니(Danny)과 인터뷰를 했다.
식인 풍습은 이 섬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인 1816년까지 이어졌다. 큰 죄를 지어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은 목을 치고, 그 몸을 갈라서 간을 꺼내 고추와 약초를 섞어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신앙에 대해서는 19세기 초 서양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았을 때 왕을 비롯한 부족 지도자들의 결단으로 종교를 기독교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으로의 철저한 변화가 있기보다는 전통적인 미신도 많이 남겨 놓았다. 또한 주인 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았을 때, 어떻게 기독교가 되었냐고 물어보니 '부모님이 기독교니까 다 기독교인거야' 라고 단순하게 대답했다. 개인이 깊은 신앙을 가지기 보다는, 어느 순간부터 그 부족 안에 있는 당연한 문화로 여기는 것 같았다. 물론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만해도 귀한 일이지만, 한 편으로는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가 결여된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1시간 정도 이야기하던 도중 여행&맛집 전문 유튜버 썽으니의 도전 정신을 기반으로 음식 추천을 부탁했다. 그랬더니 바탁족 전통음식인 '나니우라'라는 생선요리를 추천해주었는데, 숙소에 있는 레스토랑에는 팔지 않으니 주변에 가서 문의해봐야한다고 대답했다. 나니우라라는 요리를 먹어보고 싶어서 이 레스토랑 저 레스토랑 들쑤시고 다녔는데, 파는 곳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책을 전시해놓고 파는 가게가 있어서 들어가보니 메뉴판이 있었고 Popys restaurant이라고 써져 있었다. '이곳도 레스토랑이구나!' 혹시나 싶어서 나니우라가 있는지 물었더니 메뉴에는 없지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는 안되고 만드는 시간이 필요해서 지금 주문하고 5시간 후에 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갑자기 낚시대를 챙기시면서 싱싱한 생선(Fresh Fish)이 필요하므로 지금 토바 호수로 잡으러 나가야 한다는 말을 남기시고 사라지셨다. 바로 앞에 토바 호수가 있긴한데.. 뭔가 바로 잡으러 나가시는 클라스에 대단히 놀랐다. 저녁 6시쯤 방문했더니 Mr.Popy 아저씨가 밝게 웃으시며 아주 커다란 민물고기 요리를 들고 나오셨다. 사실 비릴 법도 한데 신기하게 비린 맛은 없었고, 레몬을 베이스로 소스를 만들어서 고아낸 요리 같았다. 굉장히 신맛이 강해서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지만, Mr.Popy 아저씨는 이 음식을 두고 판타스틱이라고 표현했다. 바탁족에게는 굉장히 맛있는 음식으로 여겨지는 듯 했고, 가격도 한화 13,000원(150,000IDR)으로 물가 대비 굉장히 비싼 편이었다. 1마리를 요리해주셨는데 반마리를 드시라고 돌려드렸더니 "Thank you my daughter(고마워 내딸아)"하면서 너무나 좋아하셨다. 비유를 해보자면 나니우라는 외국인들이 처음에 잘 못먹는 전통 음식인 김치찌개, 된장찌개, 청국장 같은 음식인 것 같다. 그래도 전통 현지식을 경험해볼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이었다.
나니우라가 입에 맞지 않아서 제대로 저녁 식사를 하지 못한 우리는 소영이가 검색해서 찾아낸 피자집으로 향했다.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였는데, 중간 쯤부터 비가 한 방울 두방울 떨어지는게 심상치 않았다. 도착을 5분 정도 남겨두고 비가 흠뻑 쏟아지기 시작해서 길가 지붕 아래 숨었다. 우산이 없는 상태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고, 피자집으로 가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은 옆에 매점이 있길래 매점 아주머니에게 우산을 2개 빌렸다. 물론 바디랭귀지로...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쏟아지는 비 그리고 우산을 가리키면 된다. 배가 고프니 '에라 모르겠다' 피자집부터 가자는 결론을 내렸으나, 우산을 써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쏟아지는 비로 인해 도착했을 때 이미 흠뻑 젖은 생쥐 상태였다. 생쥐고 모고 음식들을 쫘르르 시켜놓고 맛있게 먹었다. 식사가 끝나갈 때가 되자 밖의 빗소리가 귀로 들어오고, 어떻게 20분 길을 돌아가지(?)라는 걱정이 슬금슬금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아 어떻하지...?"
"우리 어떻게 돌아가..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근데 옆테이블에 감자 요리 맛있어 보인다"
"아 진짜 맛있어보이네, 먹고 싶다..."
비에 대한 걱정과 식욕이 교차하는 와중에 옆 테이블에 계신 화교 아저씨가 우리의 감자요리를 갈구하던 눈빛을 읽으셨는지 감자 요리를 나누어 주셨다.
"어머 이런 호의가..."
감자 요리는 먹음직스러운 만큼 참으로 맛있어 보였다. 화교 아저씨는 가족과 함께 여행온 듯 보였는데, 와이프와 세 명의 자녀가 함께 앉아있었다. 딸 중 한 명의 눈빛에서 "아빠 왜 이렇게 주책이야"라고 타박하는 듯한 표정을 느꼈다. 이 때 갑자기 소영이가 엄청난 아이디어를 떠올려냈다.
"우리, 저 아저씨네 한테 고맙다는 의미로 아이스크림을 쏘자."
"아이스크림? 굳이?"
"아저씨가 차를 가지고 온 것 같아, 우리를 숙소까지 태워다 줄 수도 있어"
소영이의 큰 그림에 박수를 쳤다. 피자집 아주머니에게는 우리가 대신 결제를 하고 화교 가족의 테이블에 불타는 아이스크림을 주문해달라고 말씀드렸다. 아이스크림에 살짝 술을 바르고 토치해서 비쥬얼이 어마무시한 디저트였는데, 딸들이 너무나 좋아하고 고마워했다. 환하게 웃는 모습에 우리는 확신했다.
"그래, 우리는 딸 마음까지 얻었어."
"맞아, 가족이 반대하면 아저씨가 데려다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도 못데려다주지"
식사를 마친 아저씨는 우리 테이블로 오더니, 비가 많이 오니까 혹시 걸어가야하면 차를 태워주겠다고 호의를 베푸셨다. 소영이의 큰 그림 대로 이루어졌다. 오는 길에 우산을 빌려주었던 매점 아주머니께 우산도 돌려드리고, 폭우를 뚫고 숙소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함께 사진도 찍고, 인스타그램 친구도 맺었다. 피자맛도 맛있었지만 에피소드가 있었던 식당이어서 더 재밌었던 추억으로 남았다. 유튜브 각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