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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잉조랭이 May 30. 2022

적당히 성실하게, 열심히 우울하게

우울증과의 전쟁 2,  우울증에 대한 나의 이유1

왜 다들 나를 괴롭히는거야!


 무기력함, 내가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 내가 나를 싫어하게 되었던 이유 중에 하나였다. 이것이 언제부터 시작이었느냐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었다. 켜켜히 쌓인 스트레스와 오랜 시간 누적된 인간관계를 향한 피로감, 그리고 이뤄내야 한다는 그 의무감에서 비롯한 쓸데없는 자존심이 나를 만들었다. 그것이 모두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스트레스가 가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고, 인간관계는 사람을 이롭게 하며, 의무감은 날 움직이게 하니까. 온전히 그 모든 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분명히 우리는 외부로부터 많은 충돌을 겪는다. 하지만 그것이 온전한가. 나는 온전히 피해자일수도 없고 온전한 가해자일수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우리가 피해를 겪은 것만을 기억한다. 여기서 오는 문제점이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이런 것을 지적한다면 아마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할 얘기는 하고 가자.





 첫번째의 문제.

 자기 연민(自起)

 자기 연민이라는 단어를 써본적이 있는가? 일단 자기 연민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파악해보자. 자기 자신을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것. 단어의 의미는 이렇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나는 날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나를 불쌍하게 여겨? 난 나를 싫어한다니까?" 라고 반박하려고 할 수 있다. 내가 그랬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연민을 아주 끝장나게 해내고 있다. 대부분, 우울증을 직시하고 나면, 의사에게 판정을 받으면 그런 생각을 한다. 의사의 단도직입적인 이야기와, 우리의 스토리텔링이 더해져서 "아, 사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 나의 가정환경은 이랬고, 이래서 나는 이렇게 된거야. 나는 날 싫어할 수 밖에 없는거야. 난 살고 싶지 않은게 당연했던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오히려 왜 이렇게 생각하면 안되는가? 나에게 가해를 한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부모든 사람이든 분명히 있는데. 왜 나에게 피해자로서 슬퍼할 수 없게, 불편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거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으로 계속해서 인식하고 나는 안될거란 생각을 하며 날 그 불쌍한 사람의 타이틀에 던져놓고, 나는 이럴 수 밖에 없다는 인식으로 만들어 놓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밥만 잘 먹는데, 나는 나를 미워하면서 밥도 안주고 아아, 나는 불쌍해! 나는 너무 슬퍼! 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가해자가 슬픈 법은 없다.


 내가 이 문제를 중요히 여기는 이유는, 나를 책망하는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여유를 주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여유를 주는 것을 넘어서서, 나를 포기시키는 마인드에 있다면. 그리고 끝없이 그 포기시키는 마인드가 남을 향한 원망이라면. 우리는 제로에서, 혹은 마이너스에서 곱하기를 할 뿐, 음수에서 양수가 될 수 없다. 양수가 되려면 적어도 우리가 1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나도 나에게 여유를 주자는 명목하에 모든 이유를 써서 붙이고 나의 불쌍한 이유를 나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감정은 컨트롤이 되지 않았고, 눈물과 분노만 늘었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남은 나에게 왜 이러지? 이런 생각은 결국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설령 정말로 그렇다고 해도, 나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왜?


미워도 내가 미워하고 혼내야지. 남이 미워한다고 밥 안 주면 그 보다 나쁜 나 자신이 어딨냐는 말이다.


자기 연민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나 자신에게 기회 주는 일을 멈추지 말자. 제발.





두번째

생활 습관(生活習慣)


솔직히 생활 습관이 좋은데 아픈 사람 하나도 못 봤다. 살인적인 스케쥴을 소화해내라는 말이 아니다.

"밤 늦게까지 인스타그램, 트위터, 페이스북을 하며, 새벽까지 게임을 하며, 결국 밤을 세고, 재밌는 것이 있으니까! 나는 소확행을 하고 싶은데 시간이 얼마 없는걸? 난 일을 해야해. 새벽에는 놀아야지. 안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살아? 나는 좋아하는 아이돌도 봐야겠고, 잠은 늦잠을 자고 싶고, 가능하면 나 재밌는 거 즐거운 거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


…조용히 해라^^.


인간의 뇌는 새벽 1시부터 2시부터, 잠에 들어있을 경우 회복세포가 뾰롱뾰롱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회복 세포라는 것은 결국 나의 지친 뇌를 회복시키고, 제 기능을 하게 만든가. 그런데 당신이 그 시간을 무시하고 밥을 늦게 먹고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고 낮잠을 자고 또 늦게 자고를 반복해보자. 당신의 뇌는 지금쯤 쪼그라들기 시작해서 알츠하이머라는 치매를 향해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일찍 자라고 하면 '난 잠을 못자겠어;-;' 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돌이켜보자. 잠들기 6시간 전부터 혹은 2시간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지, 그리고 새벽에 눈이 아플때까지 핸드폰을 만지지 않았는지. 미드를 보거나 당신들이 좋아하는 예능을 보느라 밤을 새우다가 낮잠을 자지 않았는지. 내 오빠가 언니가 너무 예뻐서 직캠을 돌려보다보니 어느새 벌써 2시를 외치지 않았는지. 

그리고 결국 커피를 마시며 새벽에 못 잔 잠을 겨우 이겨내고 낮잠을 안 자다가 잠을 자려고 보니 너무 졸리지 않아! 잠이 안와! 라는 상황에 이르지 않았는지.


뼈를 맞고 있는가?

맞으라고 쓰는 글이다. 


이미 내 몸을 내가 혹사시키고 있으면서 도대체 무슨 남 탓을 하고 싶은 것인가. 물론 직업 특성상 밥을 제대로 못 먹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물어보겠다. 짧은 시간동안 두유 하나도 못 마실 정도로 내가 돈이 없는가? 그리고 그 짧은 밥 타이밍에 내가 핸드폰을 하지 않는가?


십중 십은 핸드폰 하면서 남 탓 하지말아라. 밥은 적더라도, 두유를 마시는 한이 있더라도 짧은 시간동안 식사에 집중하고, 그 다음에 핸드폰을 하거나 여가 시간을 보내라. 인간의 신체리듬은 응애응애 할때부터 이렇게 하라고 만들어놨는데, 그걸 다 바꿔놓고 갑자기 잠을 자거라 이십 몇년간 일한 나의 몸아. 하면 잘 수 있는 게 아니다.


제 때 식사.

제 때 기상.

제 때 취침.


이 3박자가 맞기란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몸을 앞으로 10년 이상 운영할 예정이라면 어려워도 해내라. 이상한 비타민 같은 거 챙겨먹고 그래놓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박카스, 그리고 몬스터 추가해서 먹지 말고.


인간의 몸은 잘 운영하라고 있는 또 하나의 기업이다. 내 주식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싶다면, 그 돈으로 오래 살고 싶다면 제발 운영 방법을 생각해라. 아프니까 청춘이다! 바쁘고 밤 새니까 청춘이지! 같은 소리 하지마라. 아프니까 중년이다 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마지막이 제일 중요한 법.

감정 소모


이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아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이상하게 감정 소모를 너무 하지 못한다. 계속 채워지는 고통과 고난은 있는데, 내보내는 감정은 없다. 소모 없이 계속 감정을 쌓아두면, 그때 문제가 생긴다. 참을 인忍 세 번이면 호구라는 말도 있는데, 우리는 이상한 곳에서는 천재이고 싶은데 감정의 부분에서는 계속 호구가 된다. 왜 그럴까? 분명 기독교도 유교도 불교도 남을 해치라는 말은 없는데 누군가는 나를 해친다. 그런데 나는 못 해친다? 그냥 인식을 못한다. 나는 누군가에게는 내 감정 소모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소모가 잘못 되었을때, 우리는 분쟁이 일어났던 경험을 했을 것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고등학교 시절까지, 감정을 주체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과목으로 만들어 주지 않았다. 알려주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도덕 과목은, 해서는 안되는 일과 배려해야 하는 일만 나와있다. 즉, 해소하는 방식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으면서, 늘 너희 곁에는 선생님이 있으니 도움을 청하렴. 따위의 말만 있는 것이다. 


심지어 가족 관계에 있어서도 올바른 감정 소모가 되는 경우는 없고 갑작스럽게 우리는 금쪽이 취급을 당한다. 사회는 우리에게 '어른'이 될 것을 요구하지만, 어른이 되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고 주민등록증을 만드는 법만 알려준다. 그래서 우리는 어설프게 우리끼리 이야기하고 소통하며, 결국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상처를 받다보니, 그 감정소모를 하는 모든 길을 차단한다. 얼마나 개탄스러운 일인가. 할 줄 몰라서 시도했더니,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 사회라니. 가족조차 이해해주지 않는다니.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런 서툴고 어설픈 나를, 나도 이해할 수 없어 욕하고 있다니.


실수해도 괜찮다. 어느 순간 누군가와 관계가 틀어져도 괜찮다. 그것이 나의 이기심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사과를 할 것은 하되, 나의 감정을 막아서는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가끔 배려를 인내라고 착각하곤 하지만, 그 인내는 가끔 불이 붙지 않은 폭탄이 된다. 언제 터질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남을 위한 배려라고 한다면. 나 자신을 위한 배려는 하고 있는게 맞을까?


나 자신을 위한 배려는, 내가 감정을 담아두더라도 그 것이 흘러 넘치지 않게 천천히 다른 곳에 옮기는 연습도 해야한다. 처음에는 그 모든것이 서툴러서 폭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른바, 급발진을 하게 되더라도. 적어도 핵폭탄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나는 내 감정소모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건 정말 병이 된다. 가끔은 위장을 마비시키고, 소화를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눈물을 쏟게 하고 나 자신에게 그 누구보다 나쁜 말을 하며 누운채로 흘러가는 유머나 보고 하루를 마무리하게 되어 그 어느 것도 생산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지성, 인간의 자아.

특히 인간의 정서는 익숙해짐과 노련해짐은 있을지 몰라도, 변화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인간의 지성은 한 번 성립되면 그 순간부터 쭉 이어질 것이다. 그저 망각과 타협이 있을 뿐이지.


100년에 가까운 시간을, 우리는 쭉 하나의 정서와 지성, 자아를 가지고 살아나갈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우울에 어떻게 익숙해져야 할까.


그냥 에세이를 보며 "오, 나의 이야기 인 것 같아" 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일어나고 싶어." 라는 마음으로 당신들이 일어날 수 있는 길이 나타나면 좋겠다.


그리고 그 끝에는.

누구보다 귀하게 태어난 당신이, 당신을 사랑해주는 결말이 온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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