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할아버지는 엄밀히 말하자면 외할아버지를 말한다. 평생을 무뚝뚝했다는 친할아버지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처음 웃으시곤 했다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기억할 수도 없는 어린 때에 돌아가셨다. 나의 외할아버지, 내 할아버지는 참 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호통을 치거나 화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린 손주의 그 어떤 짓궂은 장난에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고 오히려 더 크게 당해주려 노력하였다. 그런 내 할아버지는 한편으로 참 불쌍한 사람이었다. 아직 젊다면 젊다고 할 수 있는 50대 즈음 슬하의 3남매 중 장녀와 차남을 가슴에 묻어야 했기 때문이다. 차남이 먼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장녀는 사고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장녀, 즉 내 엄마의 빈자리를 나름의 방식으로 대신 채워주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엄마가 돌아가신 9살이 넘어가는 겨울부터 13살 무렵까지의 내 기억은 신기할 정도로 흐릿하다. 무슨 작용인지 모르겠지만 다소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수많은 혼란과 급격한 변화들은 그 당시 내 기억을 지우개처럼 지워버렸다. 흐릿하나마 남아있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기억들 속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행복했던 기억들은 할아버지와의 추억들 뿐이었다. 그 당시 나에게 할아버지는 단 하나뿐인 절친이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이끌고 집 앞 놀이터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할아버지가 밀어주고 끌어주는 그네가 너무 즐거웠다. 한참을 놀다가 지나가는 개미를 쫓아가며 관찰하기도 했는데, 그런 내 옆에는 늘 할아버지가 같이 있어주었다. 나는 집에서 꽤 걸어가야만 나왔던 홈플러스에 가는 것도 좋아했다. 홈플러스에 갈 때면 할아버지는 동전을 수북이 챙겨 집을 나섰다. 홈플러스에는 내가 타고 놀 수 있는 놀이기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늘 집 앞 만화방에 돈을 맡겨두었더랬다. 그럼 나는 할아버지 집에 가는 길에 들려 강시 영화 비디오나 럭키짱 만화책을 빌렸다. 우리는 종종 도시락을 싸들고 인천 수봉공원에 있는 작은 놀이공원에 갔다. 나는 그곳에서 할아버지랑 함께 하늘다람쥐를 타는 것을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늘 달달한 믹스커피를 마셨다. 아직 애들은 먹으면 안 된다면서도 내가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조르면 마지막 한 모금은 꼭 나를 주곤 했다. 무더운 여름 때가 되면 수영장이나 물썰매장에 찾아갔다. 한창 놀다가 가장 지칠 즈음 어딘가에서 나타난 커다란 수박을 쪼개서 먹곤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친구에게 배운 카드마술을 할아버지에게 선보였다. 할아버지는 신기하다고 하면서도 손주가 마치 카드도박에 빠진 것처럼 질겁하며 내 손에 쥔 카드를 뺐어갔다. 나는 할아버지의 그 반응이 재미있어 계속해서 카드마술을 보여주었다. 할아버지는 어느 아파트 경비일을 했었다. 나는 한평이 채 되지 않는 그 작은 경비실에 들어가 앉아 있는 것이 좋았다. 할아버지 냄새가 가득한 그곳에 앉아있으면 사방에 빼곡한 처음 보는 복잡한 기계 장비들이 나로 하여금 마치 우주선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할아버지와 놀면서 자랐다. 시간이 흘러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할아버지 집으로의 발길이 뜸해졌다. 정말 오랜만에 할아버지 집에 들러 밥을 먹을 때면 할아버지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섭섭한 마음을 숨기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누구신데 여기서 밥을 드쇼?" 나는 미안한 마음을 애써 삼킨 채 금방 다시 올 것을 다짐하며 할아버지를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점차 머리가 커가며 주어진 현실을 소화하기 시작한 나에게 할아버지를 신경 쓸 겨를은 더욱 없어졌다. 아니, 그럴 겨를이 없다는 핑계가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는 가정이었지만 마음만은 꽤나 긍정적이고 여유롭게 커갔다. 나름 공부도 열심히 해서 그럴듯한 학원 한 번 다닌 적 없이도 그럴듯한대학에 갔다. 남들 하는 것은 다 하면서 살았다. 투잡 쓰리잡 알바도 뛰어보고, 연애도 하고, 동아리도 즐기고, 술도 많이 마시면서 4년을 보냈다. 학군 장교로 군에 들어갔고 전역과 동시에 취업을 했다. 취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아버지를 본게 몇년전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때였다. 쌓이고 묵은 죄책감이 가슴께에 쿵하고 내려앉았다. 죄책감에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가야지 가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루고 미뤘다. 역시나 바쁘다는 핑계였다. 19년, 결혼 준비를 할 때가 되어서야 나는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내가 늘 무등을 탔던 할아버지 어깨가 너무나 초라해져 있었다. 내가 늘 베고 누워 '사랑은 티비를 싣고'를 봤던 할아버지의 다리는 너무 얇아져 있었다. 푹 패인 볼과 눈두덩이에 처음에는 못 알아볼 뻔도 했다. 너무나 가벼워진 할아버지의 손을 몇 년 만에 잡았다. 죄스러움과 감사함에 눈물이 차올랐다. 할아버지는 작고 힘없는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나에게 말했다. "누구신데 여기 계셔?" 함께 온 할머니와 다른 가족들은 할아버지 정신이 오락가락 해 손주도 못 알아본다고 여겼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내 할아버지는 그대로였다.
코로나가 세상을 휩쓸었다. 요양원에 코로나가 퍼져 많은 어르신들이 돌아가셨다는 안타까운 뉴스가 종종 들렸고, 가장 먼저 요양원부터 외부인 출입이 막혔다. 걱정이 많았지만 다행히 별일 없이 2024년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가정을 꾸리고 많은 일을 겪고 아기도 생겼다. 코로나로 막혀있던 할아버지의 면회가 풀렸다는 소식을 듣고 오랬만에 할아버지를 찾았다. 아기가 태어난 지 채 100일 정도 된 때였기 때문에 아쉽게도 아기는 데려가지 못했다. 다시금 오랜만에 본 할아버지는 조금 더 연로해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아기 사진을 보여주면서 내 나이가 벌써 서른이 넘었고 아기도 생겼다는 이야기를 했다. 더불어 이제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라고 놀려대었다. 할아버지는 사진 속 아기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둘 다 나라고 말했다. 다음번엔 아기를 데려 오겠다는 나의 말에 할아버지는 당신이 죽기 전에 꼭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슬프게도 나는 그 부탁을 지키지 못했다.
그날은 유독 정신이 없었다. 아기 병원 예약 시간이 다되어 서두르다가 떨어뜨린 휴대폰이 차에 밟혀 망가진 날, 잠시 잠깐 휴대폰 없이 살면서 아날로그의 삶이란 이런 거였구나 농담 짓던 날, 하필이면 그날, 운명의 장난처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생각해 보면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이 모든 일이 잘 풀리지 않았었다. 난생처음 휴대폰이 차에 밟혔고, 새 휴대폰을 만들러 갔지만 신분증을 깜박해 개통이 지연되었고, 뒤늦게 공폰에 유심만 갈아 끼웠지만 집에 두고 나와버렸었다. 그 당시에도 참 병신 같은 새끼라며 스스로 자조했으나, 병신이라는 말조차 아까운 짓이었을 줄은 몰랐다. 어찌어찌 새 휴대폰을 마련하고 이번에는 아기를 데리고 할아버지를 보러 갈 거라고 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는 왜 연락이 안 되었냐고 대뜸 화를 내더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딱 5일 전 일이었다. 황망하게 근 20년 만에 외삼촌에게 전화를 했고 딱 전날 밤 양지바른 곳에 뼛가루를 뿌렸다고 했다.
내 할아버지는 당신의 삶처럼 아주 소박하게 돌아가셨다. 삼남매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할아버지의 막내아들과 할머니만 그 임종을 지켰다. 올 사람도 없었고 장례식도 없었다. 그저 안치실에 조금 모셨다가 화장을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내게 연락을 했지먼 받지 않아 그냥 두었다고 했다. 사실 다른 방식으로도 연락할 방도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와 후회한들 달라질 일은 없으며 할아버지가 나의 후회를 바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할아버지는 내가 굳이 시간 내어 당신의 임종에 오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저 내가 평소처럼 별일 없이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날따라 도통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것았을까 모르겠다. 다만 오랜 시간 동안 요양원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던 할아버지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쓰리다. 살아계실 적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는 죄스러운 마음을 안고 조용히 눈물만 흘릴 뿐이다. 이럴 때일수록 법률스님의 말씀을 내 안에 새긴다. 저승이 있고 천국, 혹은 극락이 있다면 내 할아버지는 그곳에 가셨을 것이다.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가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갈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이제는 먼저 보낸 아들, 딸과 같이 평안하게 쉬고 계시길 바라본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할아버지를 추모하고자 이 글을 쓴다. 또한 수많은 자기 자랑과 기록물이 판치는 SNS에 내 할아버지가 얼마나 나를 사랑해 줬는지, 얼마나 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는지 자랑하고 기록하고자 이 글을 적는다. 그러니 이 글은 곧 할아버지에 대한 내 추모글이자 자랑글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은 내가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할아버지는 엄마의 빈자리를 충분히 차고 넘치게 채워주었다.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한테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뭐... 할아버지도 나한테 그런 감정표현을 말로 한 적은 없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알고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나의 순하고 착한 할아버지가 다음생에는 내 손자로 태어나 주면 좋겠다. 태어나는 것이 싫으면 그냥 거기 그대로 계시고 나중에 내가 그곳에 가거들랑 다시 한번 같이 놀아도, 그것 또한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