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궤변론자 Jul 25. 2024

부부싸움

다툼

아내와 다툼을 겪으면 내 인생은 스톱이 된다.

느닷없이 탈선된 기차처럼, 머리 어딘가가 다쳐서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철새처럼.

나는 가야 할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나는 가진 게 참 없는 사람이다.

남들처럼 이렇다 할 꿈이 없다. 목표도 없다.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그저 아내가 행복하면 그만인 인생이다. 

잘못된 인생인가. 근본적인 원인은 거기서 오는 걸까. 

나는 아내 하나만 바라보고 결혼을 했다. 아내만 있으면, 아내가 웃으면, 어린애처럼 기뻐할 때면, 그만큼 행복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게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는 모조리 아내가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것이었으니까.

그랬다. 그렇게 살아왔다. 지금까지도 크게 변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내가 임신을 했다. 그리고 임신 중반 유산을 겪었다. 참 괴롭고 힘든 시기였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했던 아내는 없던 일 취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크게 후폭풍이 왔다. 

그렇게 내가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옆에서 아내 케어를 하면서 지냈다. 아내는 다시 회복했고 다시 아이를 가졌고 다행히 잘 태어났다. 자연스럽게 내가 육아와 살림을 도맡게 되었다.


나는 아내만 행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렇지도 않았다보다.

집에만 갇혀서 애만 보고 살림만 하는 내 모습이 썩 애달파 보였던 것 같다. 머리는 떡지고, 살은 뒤룩뒤룩 찌고, 수염은 대충 깎아서 거뭇거뭇하며, 옷가지는 여기저기 얼룩덜룩 에 늘어진 옷이 딱 상백수였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백수는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육아와 살림을 도맡고 있으니까.

근데 그 삶이 그렇게 재밌고 행복하지는 않았나 보다.

점점 아내에게 섭섭한 감정이 쌓여왔다. 빨리 퇴근하지 않고 일하는 모습에서, 퇴근해서 피곤해하면서 먼저 자리에 눕는 모습에서, 청소는커녕 여기저기 물건을 늘어놓는 모습에서, 주말에도 일하러 가곤 하는 모습들에서 말이다. 

혼자서 우리 가족 생계를 위해 일하는 아내에게 미안했다. 고마웠다. 감사했다. 그래서 위와 같은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한 번 더 힘내자, 한 번 더 하자, 한 번 더 걷자 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아내에게 육아나 살림에 대해 단 한 번을 요청한 적이 없었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는 섭섭함이 쌓였다. 애가 크면, 내가 일을 시작하면 어느 정도 해결되겠지 하며 버텼지만 그래도 쌓이는 건 쌓이는 것이었나 보다.


남자가 전업육아를 하니 육아 동지랄게 없다. 그나마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니 같은 반 엄마들과의 카톡방에 초대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겉도는 건 사실이다. 그중 그나마 자주 마주친 친한 엄마가 있다. 그 엄마에게 이런저런 하소연을 했더랬다. 우리 집 아내는 점심 저녁도 다 차려줘야 한다. 본인이 먹고 싶은 거 아니면 잘 안 먹는다. 청소도 안 하고 아기 목욕도 잘 안 시킨다. 등등 으레 엄마들이 하는 그런 불평불만을 말이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진실이었다. 아내를 위해 내가 한다고 생각했지만 켜켜이 쌓였던 그런 마음들이었다.


그러다가 그 엄마가 실수를 한다. 어린이집 엄마들 모임에 아내가 나왔을 때, 아내에게 진짜 아무것도 안 도와주시냐고 물어본 것이다. 나는 그 옆에 있었지만 아무 말하지 않았다.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그것이 아내에게는 참 아픈 비수였다. 


집으로 돌아와 난리가 났다. 본인이 그렇게 무책임한 남편이냐고 물으며 소리친다. 자기가 일하는 게 쉬운 줄 아는지 되물었고, 무엇이 그렇게 불만이고 불행인지 따져 물었다. 나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아내는 더욱이나 충격을 받았다. 어린이집도 보내고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불만인지 물었다. 그럼 일을 하라고 한다. 지금이라도 취직을 해서 일하라고 소리친다. 나름 부업이랍시고 하던 일들을 나열하며 아이가 아직 20개월 밖에 안 됐으니 좀 더 키우고 본격적으로 일 할 생각이라고 해도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럴 거면 불평불만을 갖지 말아야지, 그 생각 자체를 가지지 말아야지라고 쏟아낸다. 이제 나에 대한 사상검증에 들어간다. 평소에도 이렇게 살았는지, 지금까지 결혼생활이 그래왔는지, 억지로 살면서 어떻게 버텼는지 등. 벌써 어느새 억지로 살아온 사람이 되었다. 아내는 재발방지와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한다. 해결책이 무엇일까.


다시 한번 생각한다. 나는 아내를 위해 살아왔다. 아내가 행복한 것이 내가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호의는 곳간에서 나온다고, 내 마음의 곳간이 헛헛했나 보다. 아이를 키우는 지금은 그 마음으로 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 그 순간은 참 힘들었다고 변명해 본다. 


이제 아내는 내 진심을 의심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궤적을 부정한다. 나에게 아무것도 의지하려 하지 않는다. 그 어떤 힘든 말도 잘하지 않는다. 잃어보니 알겠다. 너무나 아쉽고 슬프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차라리 내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나아질까. 때때로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인지 묻는다. 다만 그래도 어찌할 방도는 없다. 참 인생은 고달프다. 정말 포기하고 싶어질 정도로.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고됨의 밭 가운데에서 한줄기 행복을 찾는다니 이것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비효율인가. 그저 생존 본능이 우리를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며 가스라이팅 하는 것이 아닐까. 아내만 바라보고 산다는 것에 대한 큰 단점이 이것인가 보다 싶다. 아내가 사라지면 나 또한 사라진다. 말 그대로 그다지 살 이유가 없어진다. 공허 속에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그런 인생이 되어버린다. 참으로 지독하게 외롭고 어렵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독을 동경하는 유일한 생물, 인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