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채리 Mar 22. 2021

기념일에 대하여

<과테말라에서 강원도로>

도연에게,


구구절절 답장이 늦은 이유에 대해서 쓰지 않을게(쓰면 다시 스트레스받을 것 같거든). 다만 3월 초에 너의 답장을 받은 후로 네가 알다시피 식모가 사라져서, 혼자 독박 육아와 사이즈가 큰 집의 집안일을 홀로 도맡으면서 나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지쳐가는데, 심지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생리 전 증후군으로 호르몬까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온갖 짓들을 하는 바람에 밑도 끝도 없는 짜증과 분노와 서러움으로 가득 차서는 지독한 지난 한 주를 보낸 후.. 드디어! 새 식모가 오늘 우리 집에 왔단다.(와.. 문장 하나가 왜 이렇게 길어..) 새 식모가 오고 나니 나는 이제야 안도감에 정서적 여유로움을 되찾아 이렇게 너에게 답장을 쓰게 되었지. 


네 답장을 읽고는 기념일에 대해 얘기를 해볼까 해. 나는 사실 결혼 전에는 기념일을 생일 외엔 안 챙기는 타입이었어. 크리스마스에 뭐할까? 하면 이브날 술이나 진탕 마실 내 모습이 뻔하므로 집에서 쉬고 싶어 했지. 고작 생일 정도를 챙겼는데 그마저도 적당한 선물과 저녁식사 정도면 만족하는 타입이었어. 빼빼로데이니 화이트데이 밸런타인데이 무슨 데이 무슨 데이 나는 그런 건 정말 딱! 질색이야!! 다 상술 아니니 그런 건? 내가 그런 걸 챙겨주기 귀찮았기 때문에 받는 것 또한 거부했어. "우리 서로 안 주고 안 받기야! 난 그런 날들 안 챙겨." 하고 미리 선을 그었지. 그런데 결혼하고 나니까 상황은 달라졌어. 결혼 전엔 그런 거 안 챙겨도 친구들과 만나서 놀고 여행 다니고.. 재밌는 일들이 너무 많았는데, 결혼해서 집에서 육아와 살림을 하며 지내다 보니 그런 것들이 소소한 이벤트가 되는 것 같더라고. 아! 여기엔 약간의 특수성이 있다는 점이 중요한 요인이야. 나는 결혼을 하고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파나마로 갔다는 것. 그땐 내 세계의 전부가 오빠와 나, 단 둘이었으니 재밌는 일도 우리 둘이서 만들어가야 했다는 거지. 게다가 출산을 하고선 코로나까지 터져 집에서 오랜 기간 격리생활을 하게 됐으니 재밌는 이벤트를 억지로 만들지 않으면 재밌는 일들은 일어나질 않았어. 왜 그렇잖아. 뭔가를 해야 재미도 행복도 슬픔도 느끼는 거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 그래서 난 그렇게 매달 시호의 성장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 달에 한 번 생리를 하는 것 말고는 그것이 최대 월간 이벤트였거든.


자, 그래서 결론적으로 내가 기념일 챙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냐? 하고 써놓고는 지금 한참을 깜박이는 커서만 보고 있어. 난 좋아하는 걸까 아닌 걸까. 여전히 헷갈리네. 좋아하는 사람 치고는 너무 챙기는 날이 별로 없는 것 같고(왠지 기념일 챙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처음 만난 날, 만난 지 천일 되는 날.. 등등 다양하게 카운트하면서 챙길 것 같거든), 귀찮아하는 것치곤 결혼기념일에 시호 없는 단 둘이서의 근사한 저녁식사나 가까운 곳으로의 1박 2일 여행 정도를 기대하거든. 아! 그리고 나는 매년 결혼기념일엔 가족사진을 셀프로 찍는 우리 가족의 규칙도 정해두었고. 이만하면 나는, 기념일 챙기는 걸 좋아하는 사람으로 분류되어야겠지? 


오빠와 나는 생일, 결혼기념일 정도를 챙기는데 밸런타인데이와 크리스마스는 조금 깍두기처럼 끼워주고 싶달까? 마음을 전하기 좋은 날이잖아.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챙기는 두 날엔 사랑을 전하기에도 좋고 마음껏 설레기에도 좋고 말이야. 그렇다고 굳이 챙기지 않는다고 해서 서운할 건 없는.. 딱 깍두기 정도의 온도. 


그나저나 너는 기념일 챙기는 일에 무심하다고 했는데, 화이트 데이에 '작년 화이트데이엔 사탕도 주고 꽃도 주더니 변했다'며 남편을 타박하는 인스타 스토리를 본 건.. 못 본 체할게. ^^^^ 


3월이 벌써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니, 나에겐 지독한 3월이었지만 그곳엔 봄이 도착했겠지? 네가 지내는 강원도의 3월은 여전히 춥겠지만 그래도 때가 되면 네가 보채지 않아도 찾아오겠지. 생리년처럼(아... 제목을 '기념일과 생리'로 바꿀까..). 


그래도 지난달에 한국에서 받은 택배에 찜질팩이 있어 이번 달부터는 배를 뜨듯하게 지지며 잘 수 있어 조금은 위로가 된다. 


3월 말엔 지난 편지에서 썼던 부활절 연휴가 시작돼. 나는 지인 가족들과 함께 시티에서 가까운 근교로 떠나 2박 3일 동안 지내기로 했어. 에어비앤비로 큰 집 하나를 통째로 빌렸는데 호수가 보이고 잔디밭도 넓고 수영장도 있는 그런 집이야. 게다가 부활절 연휴는 이곳에서 극성수기인데도 가격도 합리적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어. 다음 편지에선 나의 아주 오랜만의 짧은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신난다. 


그럼 너의 3월 이야기도 기다릴게!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과테말라에서 채리가.


매거진의 이전글 여전히 겨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