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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채리 Apr 13. 2021

산만한 to do list

<과테말라에서 강원도로>

도연에게.


마침 조금 전 유튜브에서 너의 브이로그를 보고 온 참이야. 마포의 그 호텔은 정말 뷰가 엉망이더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가 노트북을 두드리는 기분 좋은 소리를 듣다가 엽떡을 먹는 장면에서.. 정말.. 얘가 나한테 왜 이러나.. 크나큰 안타까움을 느꼈지 뭐니.. 이제 그 맛조차 가물가물한 거 같아... 내 사랑 엽떡... 다음에 만나거든 나의 안부 좀 전해주련.


지난 편지에서 내가 여행 다녀온 얘기를 해주겠다, 했지만 여행은 내 기대치에 정말 10만큼도 못 채울 정도로 그닥이었어. 전혀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점, 그 정도만 얘길 하고 오늘은 다른 얘기를 할까 해. 


우리 집에 식모가 새로 왔다고는 지난 편지에서 얘기했지? 나는 제법 그녀가 마음에 들어. 잔꾀 부리지 않고 성실히 일해주거든. 시호도 그녀를 잘 따르고 말이야. 이제야 심리적 안도가 조금 생긴 건지 요샌 자꾸만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생각하게 돼. 원래도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들과 더불어 네 브이로그를 보고 나서 나도 유튜브에 브이로그를 올리고 싶다!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휴대폰 카메라를 켜봤지? 아.. 근데 어플의 필터 없는 내 얼굴이 너무 꼴 보기 싫더라? 이런 걸 좀 찍으려면 얼굴에 뭐라도 좀 찍어 발라야 하겠더라고. 게다가 폰을 세워둘 거치대나 삼각대도 없고, 핵심적으로는 내 폰의 카메라 화질도 구리고(사실 진정한 핵심은 내 얼굴이지만 휴대폰 성능으로 책임을 떠넘겨볼까 해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에이, 뭐 나중에 폰이나 바꾸면 그때 해볼까? 하면서 블로그나 써야겠다 하고 랩톱을 열었지. 열었더니 마지막으로 보던 영상이 그대로 띄워져 있더군. 스페인어 고급 문법 강의였어. (근데 재생시간은 고작 2분 30초가량.. )


내가 요즘 하고 싶은 게 많구나.. 생각하면서 갑자기 너한테 답장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블로그 쓴다고 노트북 열고선 갑자기 너한테 답장을 쓰게 된 거야. 요즘 나의 상태(?)가 대단히 산만한 느낌이다. ㅋㅋㅋ


그래도 그것이 하루하루 버텨내듯 집안일과 육아에 치여 '시호가 잘 때 나도 쉬어야 살 수 있어!'라는 식의 삶을 벗어났다는 것을 방증해주는 것 같아 제법 유쾌한 기분이 들어. 내가 엄마가 아닌, 나로서의 삶에 대해 조금이나마 고민하고 있다는 것일테니.


이것도 해야하고 저것도 해야하는 것들이 쌓여 있는 와중에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으나 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이고 (시호가 낮잠을 자거나 유모랑 노는 시간 중에서 내가 시호 삼시세끼 밥 하는 시간을 뺀 시간) ! 나는 그 애틋한 시간을 헛되게 보내고 싶진 않은 거야. 무언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그 시간을 채우고 싶은데, 늘 해오던 책읽기나 블로그에 일기쓰기 외에 뭔가 신선한 자극이 되는 일을 하고 싶은가봐.


아무튼 오늘은, 시호가 오후에 유모와 놀이터에 나가면 스페인어 공부/책읽기/블로그 일기쓰기 중에 하나를 하게 될텐데.. 난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내가 제일 궁금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엊그제 한국에서 택배가 왔거든. 책을 중고로 잔뜩 사서 저렴하게 아주 많이 사왔어. 그 중엔 아무튼 시리즈의 책도 꽤 많은데, '아무튼 외국어'를 읽고 나면 스페인어를 더 열심히 공부할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해. 그럼 스페인어 공부는 그 책을 읽은 후로 좀 미뤄볼까. 헤헤


다음 편지에선 결국 난 요즘 어떤 일에 시간과 마음을 쏟고 있는지 어지럽던 계획들이 좀 정리되어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너의 소설공모전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구나. 벌써 결과가 나오진 않았을 것 같긴 하지만, 스스로 마음에 드는 소설을 썼는지 그간의 작업과정이 즐거웠는지 등등.. 소식 기다릴게!


추신: 시호가 나가려던 찰나에 비가 쏟아져서 시호는 결국 나가지 못했다.. 고로 난 그 어느 선택도 할 수 없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또르르... 

그럼 시간 날 때 답장 좀.


과테말라에서 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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