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에서 강원도로>
도연에게,
나는 지금 가스불(정확히는 전기로 작동하는 제품이지만) 위에 소고기 미역국과 압력밥솥에 안친 흰쌀밥을 올려두고 주방문에서 두 발자국만 나오면 있는 식탁에 앉아 랩톱을 열었어. 실은 어제저녁에 너에게 답장을 쓰려고 했었는데, 제법 고대하고 있던 책을 어제 손에 쥐게 된 바람에 어제저녁엔 책장을 넘겨야 했단다. 그 책은 바로 '키키 키린'이라는 책이야. 너도 그 일본의 할머니 배우를 알고 있어?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해. 잔잔하고 가족들의 이야기를 많이 담잖아. 키키 키린 할머니는 그 감독의 페르소나임에 틀림이 없고.. 그래서 영화를 통해서 그 할머니를 알게 되었지. '앙, 단팥 인생 이야기'라는 영화를 보면서 나는 그 할머니한테 얼마쯤 반했던 것 같아. 저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였으면 좋겠어.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 우리 할머니가 저 영화 속 할머니처럼 마음도 따뜻하고 말투도 연세답게 조금 어눌하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나는 외할머니 한 분 계시는데, 말도 마라... 얼마나 꼬장꼬장하신 성격인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버이날이나 명절을 쇠고 오면 우리 엄마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내가 너네 할머니처럼 늙을까 봐 걱정이다"라고 한다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일례로, 이번 추석 때에 할머니 댁에 식구들이 모였는데 외숙모랑 이모가 주방을 정리하고 있었나 봐. 우리 언니는 앉아서 애들 보며 쉬고 있었대. 그랬더니 할머니가 "너는 네 시댁 가서도 그렇게 앉아있냐??" 하시더래. 그래서 막내 이모가 설거지하다 말고 뒤돌아서는 "아니 그럼 얘가 친정에 와서나 쉬지 어디 가서 쉬어!!" 하면서 팩 하고 쏘아붙였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그날 언니가 나한테 페이스톡을 걸어와서는 "채리야.. 우리 할머니는 백 살까지는 거뜬히 사실 거 같아.."라고 했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지금 아흔이 넘으셨는데도 정신이 얼마나 멀쩡하시고 셈도 빠르신지..(우리 할머니는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이신 분이거든) 뭐 쓰다 보니 할머니 험담이 되었지만... 아무튼 나는 우리 할머니와는 너무 다른 그 영화 속 할머니를 보며 그 할머니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 그리고 3년 전쯤 그 할머니가 별세하셨다는 뉴스를 봤을 때 마음 어느 한구석이 조금 아리기도 하더라.
그런데, 그 할머니의 말을 담아낸 에세이가 있는 거야. 몰랐어! 그런 책이 있는 줄. 초판이 2019년인 책인데 2년이나 지나서 알게 되었지 뭐야. 보니까 이 책은 그 할머니가 생전에 인터뷰, 방송, 개인적인 대화 등에서 했던 얘기들을 엮어서 책으로 만든 거더라고. 어제 시호를 재워놓고 나와 이 책을 읽다가 눈꺼풀이 무거워져서 시계를 보니 어김없는 11시였어. 훌훌 읽히는 책이라 절반이나 읽었더라고. 왜 그런 거 있잖아. 할머니들이 해주는 얘기는 인생을 예습하는 기분이 들어서 좋아. 양희은 님 책을 좋아했던 이유도 그런 거였을지도 모르겠어. 네가 다음에 서점에 나서는 날, 이 책을 휘리릭 넘겨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너의 편지에 적힌 겨울의 장점 중에서 매일 같은 옷을 입어도 옷에 땀냄새가 배지 않는다는 것을 보며 나는 반대로 그것이 겨울의 단점이라고 생각했어. 팔팔 끓여먹는 가스불 앞에서 전골에 밥이라도 먹고 오는 날엔 스웨터에 음식 냄새가 잔뜩 배어버리곤 하잖니.(닭갈비 먹은 날엔 진심 대중교통 타기가 미안할 지경..) 그리고 스웨터는... 너도 알다시피 빨기 졸라 힘들다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쨌든 그래도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 겨울파야.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서는 순간 바싹 마른 겨울 냄새가 코끝을 스치기만 해도 기분이 노곤 노곤해지는 겨울파. 그런데 너도 몽골에 내가 대장 패딩 챙겨간 걸 보고 놀랐듯이... 나는 또 히트텍없이는 겨울을 나지 못하는 류의 인간이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 추위를 많이 타지만, 겨울을 좋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을 좋아해. 이거 어쩐지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마음과 결이 비슷한 것 같군ㅋㅋㅋㅋㅋ 그놈이 날 힘들게 하지만.. 난 그래도 그놈한테 자꾸 끌리는 뭐 그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요즘 바이올린 학생이 다섯 명으로 늘었어. 어떤 날엔 하루에 한 시간, 또 어떤 날엔 두 시간 이렇게 수요일을 제외한 모든 평일에 수업이 있어. 우리나라 여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님(이태리 사람인데 이름을 모를...)이 선수를 뛰어본 적이 없다고 하잖아? 나는 바이올린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교수법이 좋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응.. 뭐 내 자랑인데... 난 뭔가를 가르치는 걸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구나, 역시 나는 가르치려 드는 걸 좋아하는 어쩔 수 없는 꼰대형 인간이었음을 명백하게 확인해버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곧 10월이 다가온다. 믿기니? 두어 달이 지나면 파나마에서 과테말라로 이주해온 지도 일 년이 된다니. 강원도는 이제 금방 단풍이 지겠다. 예쁘게 물든 강원도의 가을 이야기를 기다릴게.
그럼 안 바쁠 때 답장 좀.
과테말라에서 채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