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에서 강원도로>
도연에게,
답장이 많이 늦었다. 허허.. 답장은 늦어도 한 달 이내에는 쓰는 것이 우리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내가 그것을 과감하게 깨뜨렸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얼마 전에 마이애미로 여행을 다녀왔어. 이곳에선 (Semana Santa)라고 하는데, 부활절 직전의 성 주간을 뜻해.
거룩하고 성스럽게 보내야 마땅한 시기이지만, 사실 그 기간은 이곳에서 여름휴가의 기간이야.ㅎㅎ
한국처럼 길게 쉬는 명절이 없는 곳이라, 이곳에선 부활절 연휴와 크리스마스, 연말 정도가 그나마의 연휴거든.
게다가 이곳은 이 즈음이 나름의 여름이기도 해! 정말이지 부쩍 더워졌다니까!
엊그제는 시호와 산책을 하는데 너무 더워서 날씨 앱을 켜보니 글쎄, 31도까지 올랐지 뭐니??!!
다행인 것은 이곳은 해가 뜨거워도 습하지 않아서 불쾌함은 없고, 그저 뜨겁기만 해.
게다가 곧 우기가 시작되면(다음 주면 시작되는 것 같아. 날씨 앱을 보니 다음 주엔 매일매일 비 그림이 있더라고!) 시원해질 테니,
나는 여름이 참 짧기도 한 곳에 살고 있네..
여름 이야기를 하니까 생각났는데, 네가 전에 ‘아무튼 여름’이라는 책을 추천했었잖아! 나는 그걸 읽으면서 정말 공감이 하나도 안됐거든..
왜냐면 나는.. 겨울 파야!! ㅋㅋㅋㅋ징그럽게 추위를 많이 타지만.. 그래도 나는 겨울의 무드를 좋아해. 누군가 ‘아무튼 겨울’이라는 책을 써줬으면 좋겠어.
아참, 마이애미 여행 이야기로 돌아와서, 당연히 셋이서 다 같이 가려던 계획이었는데.. 변호사가 일처리를 빨리 안 해줘서 시호의 비자 문제가 출국 전에 해결이 안 되었어. ㅠㅠ
그래서 “마이애미 여행 다 취소하자..”하고 오빠와 이야기했는데, 어머님이 그걸 아시고는 시호를 봐주시겠다고 둘이 다녀오라고 하신 거야…
세상에..! 이런 것이야말로 ‘전화위복’ 아니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날까지 이민청에서 스트레스 잔뜩 받았는데, 갑자기 아이 없는 자유로운 여행이라니!!
바로 아쿠아리움 예약 취소했잖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호도 없는데, 아쿠아리움 가서 뭐하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늦은 밤, 스포츠 펍에서 마시는 맥주.
걷고 싶은 만큼 무작정 걷는 발걸음.
졸릴 땐 언제든 누워 단잠에 빠질 수 있는 여유.
아이의 손이나 유모차가 아닌.. 맞잡은 오빠의 손.
아, 우리에겐 이런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구나, 싶을 만큼 즐거운 3박 4일이었어.
마지막 날이 되니 그제야 시호가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가지고…
원래는 도착해서 다음 날 데리러 가려고 했는데, 도착하자마자 그 길로 두 시간을 차 타고 달려 어머님 댁으로 갔지 뭐야. ㅎㅎ
그러곤 다음부터는 어디든 아이와 함께 해야지, 하고 다짐했어. 참.. 간사한 어미의 마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이애미는 이제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더라. 마치 코로나 같은 게 언제 있었냐는 듯이.
한국도 많은 제재들이 해제되었다고 들었는데, 이제 좀 사람 사는 것 같아지겠구나.. 싶어.
올 겨울 너의 강원도 집에서 보낼 시간들이 더 기대가 된다. 특히 조개와 삼겹살을 구워 먹자는 부분에서 하..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져 버렸어.
너의 봄엔 어떤 새로운 마음들을 먹었니? 인스타로 봤을 땐, 예전보다 책을 더 열심히 읽는 것 같기도 하던데.
나는 글쎄.. 새로이 어떤 마음이나 계획을 다짐한 것은 없지만(솔직히 지금보다 더 바쁘고 열심히 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더 이상 새로운 무언가를 하는 건 불가능 ㅋㅋㅋ)
새로 실행한 것이 있다면.. 꽃을 정기배송 받기 시작했다는 거야. 어쩐지 봄과 퍽 잘 어울리는 일이지 않니?
뭐.. 여기는 영원한 봄의 나라이니, 어느 때고 잘 어울리긴 한다만..
우리 집 바로 옆에 꽃집이 있어. 그리고 길거리에도 꽃집들이 많이 있지. 그런데 여러 꽃을 섞어서 묶은 다발로는 잘 안 팔아. ㅠㅠ
그래서 여러 꽃을 섞고 싶으면 각각의 꽃들을 다 한 묶음씩 사서 섞어야 하는데, 그럼 거의 한 다섯 다발은 나오게 되니, 그렇게 사기가 힘들지.
가끔 어떤 꽃집들은 다양하 꽃을 섞어 다발로 팔기는 하는데, 값을 너무 비싸게 받더라고.
한국 꽃다발 가격을 생각하면 그렇게 비싼 비용은 아닌 것 같지만, 이곳의 꽃값을 생각하면 선뜻 사게 되지 않는달까…
그러다 안티구아라는(커피가 유명한 곳이라 너도 들어봤을 것 같아) 시티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곳에 있는 꽃 농장에서 정기적으로 주말에 시티로 꽃 배송을 하는 걸 알게 되었어.
비용도 무지무지 저렴하다고. 큰 화병 두 개가 꽉 찰 정도의 양의 커다란 꽃다발 하나가 1만 5천 원이야. 거기에 시티는 배송료가 4천 원 붙기는 하는데..
그걸 다 감안한다고 해도 꽃집에서 여러 꽃을 고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실용적으로 예쁜 꽃들을 즐길 수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꽃을 사러가는 설렘만큼이나 꽃을 기다리는 산뜻한 기다림도 나의 토요일을 더 향기롭게 해 주더라.
난 요즘 시호 기저귀 떼는 도전을 시작했어.
오늘은 하의를 발가벗겨놨는데, 한번 매트에 실수를 하고 4번은 변기에 가서 쌌어. 다만 팬티나 바지를 입히면 그냥 그대로 줄줄 싸버리더라고.
지금 기저귀 없이 바지만 입고 Paola와 앞에 놀러 나갔는데.. 과연 바지가 젖어서 들어올지 온전하게 들어올지.. 기대가 된다. ㅎㅎ
다음 편지에선 시호의 기저귀 떼기 성공 여부를 알릴 수 있겠구나!
마지막으로 마이애미 사진 첨부할게 :) 나는 너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사진을 동봉(편지니까 첨부라는 단어보다 괜히 동봉이라고 말하고 싶네)하는 일이 즐거워!
진짜로 엽서 같은 걸 국제 우편 보내는 기분이 들곤 하니까. ㅎㅎ
그럼 곧 너의 여름 소식 기다릴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간 날 때 답장 좀 :)
과테말라에서 채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