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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리라 Aug 08. 2021

우리의 시작을 기억해본다

그가 변한건지 내가 변한건지

마치 16부작 드라마의 마지막 한주를 앞두고 1회차부터 다시보기 하는 기분으로 우리의 시작을 떠올려 본다.


우리는 연상연하 커플이다.

우리의 첫 만남은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시작되었다.

2012년의 가을 32살이었던 나는 6년차 직장인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던 시기였고 지금은 사무치게 그리운 미혼의 그 소중한 자유로움을 무료함과 지루함으로 그저 하루하루 버텨내기 기분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잃어봐야 소중함을 아는 법이다.


 2021년의 미혼여성들도 20대에서 30대가 된다는 그 스트레스가 존재할까? 30대초반에 결혼하지 않은 미혼여성이 겪는 무언의 사회적 압박감과 뒤처짐에 대한 스트레스가 아직도 있는지 궁금하지만 이미 40대가 되어버린 나는 이런 단순한거 하나도 물어볼 20대지인이 존재하진 않는다.

사실 32살의 나는 뭐 그렇게 결혼스트레스가 있던 시기는 아니었다. 집에서도 크게 압박이 없는 분위기였고, 편입도 하고 약간의 고시공부도 했던 개인사 덕분에 또래에 비해 약간은 늦게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던 터라 친구들이 많이 결혼하던 29~31살쯤에 나는 커리어에 집중하느라 별로 결혼 생각이 없었고 왜 그랬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34살쯤에 결혼해야지 라고 막연하고 확고한 기준을 갖고 있었던 거 같다.


다만 이 시기에 내 인생이 점점 지루하고 무료해진 이유는 아마도 매출의 정체와 주위 친한 친구들이 모두 결혼을 하면서 같은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주변인들이 점점 사라졌기 때문이었을꺼다.

그때 나는 금융업쪽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덥고 지치는 여름 시즌에는 항상 높은 매출달성을 위한 프로모션이 있었다. 6~8월동안 나는 그 목표치를 달성해두고 내 인생의 가장 긴 장기휴가를 신청했다. 그리고 나는 유럽으로 혼자만의 여행을 떠났다.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스위스, 체코 등을 지나는 여정에서 나와 남편이 만난 곳은 체코 프라하의 게스트하우스였다.

나는 혼자 여행을 왔지만 남편은 그 당시 친한친구와 둘이서 여행을 온 상황이었다.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하며 여행을 다녀본 사람들에게는 흔히 있는 경험은 같은 숙소에 머무른다는 공통점 하나로 스스럼없이 친해지고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과 바로 그룹을 조인하여 식사도 하고 근처 관광도 함께 다니는 것이다.

나는 유럽여행의 첫 시작이었던 이탈리아는 대학교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다음 코스인 스위스부터 혼자 여행다니다가 프라하로 넘어온 상태여서 그 당시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좀 지쳐있었다.

아마도 여행하면서 타지에서 오롯이 혼자라는 외로움을 좀 느끼게 된 시기였던 거 같다. 스위스는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물가가 비싸다. 그래서 혼자 여행다니면서 좋아하는 걸 마음껏 하기에는 비용적인 부담도 좀 있었던 나라였는데 프라하는 스위스 물가의 절반도 안되는 돈으로도 엄청 맛있는 음식과 쇼핑을 할 수 있다는게 가능한 도시였고, 그덕분인지 프라하로 넘어온 첫 날 부터 나는 기분이 좋았다


운이 좋게도 프라하 숙소에서 만난 같은 방 여자들이 30~32살로 모두 나이가 비슷했다. 그리고 모두 서울에 살고 있었다. 그런 두가지 공통점 덕분에 만난 첫날 여자들끼리는 모두 친밀도가 높아졌고, 사실 남편과 남편친구는 그에비해 너무 어렸고 너무 애들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저녁자리를 갖게 된 이유는 남편때문이었다기 보다는 남편친구가 예의가 좀 발랐기 때문이었다. 고만고만한 나이끼리 예의바름을 운운하는 이 표현이 약간은 웃기지만, 남편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런 성격상의 특성으로 자기사람이 아닌 타인에게 좀 무심하다. 그래서 타인에게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되 굳이 필요이상의 친절을 베풀지 않는 성격이다.


그런 무심한 성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그날밤 저녁식사 자리에도 있었다. 우리의 인원구성은 나를 포함해서 여자3명, 남편을 포함해서 남자3명이었다. 마치 무슨 머릿수 맞춘 데이트마냥 되었지만 맹세콘데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다른 이들은 모르겠다. 최소한 나는 정말 그랬다) 그저 외국에서 만난 같은 한국인이 반가운 그런 모임이었고, 프라하를 여행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체코음식이 혼자 먹는 타입의 메뉴보다 같이 먹어야 즐길 수 있는 양의 메뉴들이 많다.

남자들 구성원은 남편과 남편 친구 말고 그들보다 나이가 2살인가 많은 형 위치의 사람이 있었는데, 더치페이 형식의 저녁식사를 마치고 까를교 구경을 같이 가면서 우리는 그래도 우리가 연장자라고 까를교에서 마실 캔맥주를 마트에서 사줬다.

얻어먹는게 고마웠는지 남자멤버 중 가장 연장자인 그 아이는 자기가방에 캔맥주를 모두 주섬주섬 담으면서 자기가 들고 가겠다고 했다. 그 상황에서 나는 바로 옆에 멀뚱히 서 있는 남편을 보면서 참..예의없다고 생각했다. 얻어먹는게 예의없다는게 아니라 뻔히 자기보다 형인 저 아이가 캔맥주를 다 들겠다고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가 들께요'라고 나서지 않는 그의 성격이 나에게 남편을 좀 예의없는 어린 남자애 라고 인식되게 만들었다. 나중에 이 상황에 대해서 남편에게 물어보니 그냥 자기는 굳이 자기가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남들이 간혹 '남편이랑 어떻게 만나셨어요?"라고 물어보면 "프라하여행하다가요"라고 대답하면 엄청 로맨틱하다고 느끼곤 하는데, 사실 그냥 저게 다였다.

약간 예의없는 어린 남자애 라는 이미지를 갖고 프라하에서 나와 남편은 헤어졌고, 남편도 나에 대한 인상은 그냥 프라하에서 만난 '나이많은' 누나였다. 아마 그 당시 우리가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다면 그 로맨틱한 까를교에서 기념사진이라도 찍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때의 첫 만남을 기억할 한장의 사진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혼하고 신혼시절에 사진첩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 까를교의 연주자를 찍는 동영상에서 휙 하고 카메라가 한바퀴 돌아갈때 정말 나만 찾을 수 있는 남편의 흔적을 발견했고 반가워서 소리를 지르며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게 우리의 첫만남을 증명해 주는 유일한 기록물이 되었다.


우리의 호감은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위에서 말했듯 그날 숙소에서의 인연들은 모두 신기하게도 서울에 살고 있는 또래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유럽여행을 가는 사람들은 서울사람들만 있는게 아니라 지방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유럽여행가서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서울에 살고 있는 건 흔치않은 확률이다. 그런 멤버 구성 덕분에 우리는 서울에 돌아와서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부모님집으로부터 독립을 하여 혼자 살고 있었는데 혼자 살지만 꽤 넓었던 집 덕분에 모두들 모이는 첫 장소가 우리집이 되게 되었고, 그 자리에 남편도 왔다.

그렇게 서울에서 시작된 호감은 프라하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는 이유로 32살 여자로써 어쩌면 남자를 만날때 당연히 가늠해봐야 하는 결혼가능여부를 전제로 한 남자의 조건에 대해서 남편을 대상으로는 하나도 고려하지 않았던 거 같다. 그저 만났을때의 좋은 느낌으로만 연애가 시작되었고 나는 처음에는 아마 속으로 ‘난 34살에 결혼할꺼니까.. 한참 어린 얘랑은 결혼보다는 연애한번 해보는 걸로 마무리 짓게 되겠지’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만나면 만날수록 그저 어린 남자애였던 남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가볍게 연애한번 해보는거야”라고 주위에 말하고 시작했는데, 그 마음이 점점 “연애로만 끝나고 헤어지면 많이 슬프겠다”라고 아직 오지도 않은 이별을 생각하며 슬퍼지곤 했다.

크리스마스에 시작한 우리의 연애가 구정이라는 명절을 지나게 되었을 때 즘 나이차이와 여러가지 부족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혼이라는 게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현실감각을 살려서 그 당시 대학원에 들어가서 임용고시를 차근차근 준비하고자 계획했던 남편의 상황을 배려해서 이대로 연애하다가 3년뒤쯤 남편이 자리를 잡았을 때 결혼하는 걸 꿈꾸기 시작했는데, 나만큼이나 나에대한 사랑이 커졌던 남편은 아마도 이대로 지내다 나를 놓칠까 불안했는지 대학원을 다니면서 기간제교사로 취업을 하고 나와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한 후 나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시간이 흘러 지금처럼 최악으로 부부의 상황이 악화되고, 서로 말을 안하게 되고, 부부상담까지 오게 된 나는 우리 관계의 돌파구찾는 심정으로 예전을 생각해 보았다


왜 이 남자와 결혼하려고 했던 것일까?


내가 남편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날이 있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머리속에 반복해서 떠오른다.

연애 당시 독립해서 살고 있던 우리 집에는 남편이 자주 놀러오기도 했고, 데이트 장소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주말이면 한두번 자고 가는 날도 있었는데 그날도 아마 그런 주말이었던 거 같다.


모두들 그렇듯 아침이면 자기만의 루틴이 있고 그게 나에게는 커피였다

나는 아침이면 씻고 옷을 고르고 하는 과정에서 머리를 감고 화장을 하는 중간중간 네스프레스 머신으로 차에서 마실 커피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왔다갔다 한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라떼만 마시는 나는 캡슐을 넣고 원액을 내리고 우유를 데운다 그리고 텀블러에 담아 외출시 가지고 나가는데 몇번의 반복에서 아마도 남편은 나의 그런 루틴을 지켜봤던 것 같다.

남편은 내가 씻고 준비하는 사이 마냥 티비만 보고 늘어져 있지 않고, 나가기전 내가 씻고 준비를 하는 동안 그는 내 집안을 정리하고 내가 갖고 나갈 커피를 타서 텀블러에 담아뒀다.

우습지만 그 작은 행동에서 나는 남편과의 결혼을 결심했다. 내가 결혼하고 싶었던 남자는 다정하고 사업을 하는 나를 서포트함에 있어 자격지심을 느끼지 않는 넓은 마음의 사람이었다. 그 때의 남편은 어리지만 듬직하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었고, 그런 장점을 발견한 나에게 보통의 여자가 따져야 하는 남자의 사회적 위치와 경제력 같은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백지영 노래의 가사말그대로 ‘사랑하나면 돼’였다.


2021년 결혼8년차의 나는 그 ‘사랑’을 잃어버렸다.


남편은 여전히 시키지 않아도 집안일을 잘한다. 하지만 예전의 내가 남편과의 결혼을 결심하게 했던 그때처럼 나를 바라보고 내가 무언가 필요한게 있구나 생각해서 하는 ‘나를 위한 어떤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남편이 아닌 아빠로써의 남편만 남아있고 그에 맞는 행동이다.


이런 나의 이야기는 연애때니까 그렇지~ 신혼에나 가능한거지~ 아직도 로망이 많네~ 등등의 타박을 들을수도 있다는 걸 안다.

그치만 나는 사랑없이 살려고 결혼을 선택한 거라면 좀 더 조건을 따져 현명하게 했을것이라고 반박할 것이다.


왜 사랑을 가지고 결혼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일까? 40대의 결혼생활에 사랑을 바라는 건 왜 어이없는 로망인걸까?

나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관심과 배려,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한 걱정을 의미한다.

보고싶어 절절하고 한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안되는 그런 드라마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이 있으면 안하려고 노력하고,

기념일이나 생일이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했다가 해주려고 노력하고,

표정이 안 좋으면 뭔가 밖에서 나쁜일이 있었는지 관심가져주고,

지금 겪고 있는 나쁜일에 대해 상처입은 상대방을 걱정해주고

내가 원하는 사랑은 그런 것인데

남편은 더이상 나에게 그런 노력을 하지 않음과 더불어 더 큰 칼날로 나를 상처 입힌다.

남편과의 행복했던 과거를 기억해 보는 것은

그래.. 우리도 좋았던 시절이 있었잖아.. 다시 잘해보자! 라고 나에게 의욕을 주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시절을 떠올리는게 나를 슬프게 만들고 변해버린 남편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해서 요즘은 잘 안했다.


글쓰기로 다시 한번 회상의 시간을 가지면

틀어진 우리 관계를 고치는 또 하나의 약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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