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시간대에 대한 이야기
지리적으로 맞지 않는 중부유럽시간대를 쓰고 있는 스페인
스페인에 첫 여름 휴가를 왔을 때 저녁 9시가 되어도 거리가 환해서 놀랐었다. ‘이래서 스페인을 태양의 나라로 부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길어서인지 대충 저녁 9시가 되서야 저녁식사를 하는 문화도 어색했다. 스페인에 다녀온 다른 친구들도 오후 6~7시에 문을 여는 식당을 찾지 못해 당황했었다는 에피소드를 전했다. 해가 오래 떠 있어서 늦은 시간까지 야외활동을 더 즐길 수 있는 스페인 사람들이 부러워 핬고 절대적인 하루 일조량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녁 해는 길지만 대신 아침 해는 우리보다 늦게 뜬다는 것을 발견했다. 저녁 7시가 되어도 어두캄캄해 한밤처럼 느껴졌다. 주말 새벽6시부터 회사 동호회에서 야구경기를 했었던 나였기에 차이를 금새 느낄 수 있었다. 스페인이 사용하고 있는 표준 시간대에 대해 의문이 생겼고 제대로 알아보기로 했다.
지리적으로 스페인은 영국, 포르투갈과 같은 그리니치 표준시(GMT)를 사용해야 맞으나 현재 스페인이 채택한 시간대는 중부유럽표준시(CET)이다. 역사적으로 스페인은 1884년부터 그리니치 표준시(GMT)를 사용해 왔지만 세계 2차 대전이 진행중이던 1940년 지금의 중부유럽표준시(CET)로 변경하였다. 시간대 변경은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 시절 독일과의 연대감을 드러내기 위한 결정이었다. 호세 마리아 마르틴 오랄야(José María Martín-Olalla) 세비야대학 물리학과 교수는 스페인의 중부유럽표준시(CET) 도입에 대해 물자가 부족한 시대에는 해 뜨는 시간을 늦춰 오후 야외 활동 시간을 더 확보하는 것은 정상적이라고 설명했다. 스페인과 함께 2차대전 당시 영국, 포르투갈도 중부유럽표준시로 바꿨지만 2차 대전 종료와 함께 다시 그리니치 표준시(GMT)로 복귀하였다. 스페인만 중부유럽표준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연유로 스페인 서부 갈리시아의 비고(Vigo)는 150km 떨어진 포르투갈의 오포르토(oporto) 보다 1시간 빠른 대신, 3,200km 떨어진 폴란드의 바르샤바와 같은 시간대를 쓰고 있다. 현재 중부유럽표준시(CET)를 쓰는 국가 중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도 지리상으로는 그리니치 표준시(GMT)를 써야 한다. 여기에 EU회원국들은 3월부터 10월까지는 표준시를 1시간 더 당기는 썸머타임제를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스페인은 그리니치 표준시(GMT) 보다 2시간 빠른 (GMT +2) 시간대를 사용한다. 이 때문에 스페인 서부 갈리시아에 가면 여름에는 저녁 10시까지 해가 지지 않고 겨울에는 아침 9시까지 해가 뜨지 않는다.
그리니치 표준시(GMT)로의 복귀에 관한 논의
스페인 내에서도 그리니치 표준시(GMT)로의 복귀에 대한 찬반논쟁은 꾸준히 있어왔다. 최근 들어서는 2013년 스페인 의회가 표준시를 1시간 늦추는 방안을 논의 했었고 , 특히, 1939~1975년 프랑코 총통의 치하에 대한 반감이 크게 남아있는 카탈루냐 자치정부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스페인 상원 의회 역시 2016년 4월 정부에 시간대 변경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낸 바 있다.
그리니치 표준시(GMT)로의 변경을 주장하는 쪽은 지리적 위치에 맞는 시간대를 쓰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입장이다. 스페인의 태양시에 맞춰 13시, 20시에 식사를 하는데 이는 중부유럽시간대(CET) 기준으로 14시, 21시이다. 섬머 타임(CET+1)이 적용되는 기간(3~10월) 동안에는 15시 22시가 식사시간이다. 식사를 14시, 21시에 하는 것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식사시간이 14시라면 출근 시간도 거기에 맞춰 10시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다른 국가와 동일한 출근시간대를 적용하고있어 오전 근무시간이 지나치게 길다. 이 때문에 스페인 국민들이 불필요하게 일찍 일어나게 되고 50분 가량 잠을 덜 자게 되어 휴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리니치 표준시(GMT)로 변경하면 똑같은 8시에 일어난다 하더라도 태양시 기준으로는 1시간 더 늦게 일어나는 것이다. 식사시간도 다른 나라와 같이 점심은12~13시, 저녁은 20시 정도로 조정할 수 있다. 아침도 이른 시간에 먹게 되 오전 근무시간 도중 따로 먹는 시간을 빼지 않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다. 표준시를 지금보다 1시간 늦춰(현재 시간에서 -1) 그리니치 표준시(GMT)로 변경하면 표준 근로시간을 09시에서 18시(중간에 1시간 점심시간)로 일반화 할 수 있고 근로자들은 일과시간 내 생산성 향상에 집중하게 되면서 일과 개인생활의 균형도 개선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가사 부담을 많이 지고 있는 여성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로 OECD 통계에 따르면 스페인 근로자의 1년 평균 근로시간은 1,691시간으로. OECD 평균보다는 낮은 수치이나 같은 중유럽시간대를 쓰는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보다는 많다. 일반적으로 스페인 직장에서 오전에 흔하게 가지는 긴 커피 브레이크 시간이 전체적인 근로시간을 증가시키는 요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저녁식사가 늦은 탓에 시청률이 높고 광고 단가도 가장 높은 TV프라임(Prime) 타임도 저녁 9시가 아닌 10시30분이다. 때문에 국민들이 늦은 시간 TV를 시청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많은 스페인 국민들이 다음 출근시간까지 충분한 휴식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다. 유럽통계청(Eurostat)이 발표한 스페인 국민들의 평균 수면시간은 7.1시간으로 다른 국가들에 비해 부족하다. 따라서 그리니치 표준시(GMT) 찬성론자들은 국민건강 측면에서도 시간대 변경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스페인에 짧게 머무는 관광객들도 평소 자국에서와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할 수있다는 장점이 있다.
중부유럽시간대(CET)를 유지하자는 이들의 주장
현재의 중부유럽시간대(CET, GMT+1) 고수를 찬성하는 쪽의 의견도 나름 일리가 있다. 먼저 위의 사진은 1년에 해가 가장 짧은 동지인 12월 21일 아침과 해가 가장 긴 하지인 5월 21일 저녁사진이다. 겨울에 스페인은 프랑스, 독일과 함께 동일한 시간대에 해가 뜬다. 반면 해가 가장 긴 하지인 6월 21일의 경우 이들과 같은 시간대에 해가 진다. 현재의 중부유럽시간대(CET, GMT+1) 유지를 원하는 쪽은 시간대를 해가 짧은 겨울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동지를 기준으로 다른 모든 날들은 이날 보다 해가 일찍 뜨고 늦게 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동짓날 해가 독일과 같은 시간대에 뜨기 때문에 시간대를 중부유럽시간대(CET)와 맞추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이들과 출근시간, 근로시간을 맞출 수 있으며, 스페인은 위도 상의 이점으로 독일보다 오후에 해가 떠 있는 시간을 한 시간 더 가질 수 있다. 유럽 대륙 북부는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스페인이 위치한 남부보다 짧다. 스페인 동쪽의 바르셀로나와 독일의 베를린을 비교해 보면, 겨울철 아침 일출 시간은 거의 동일하지만, 베를린은 4시 정도에 해가 지는 반면 바르셀로나는 1시간 30분 이상 더 늦게 진다. 결국 시간대를 변경하게 되면 불필요하게 해가 일찍 떠서 오후의 소중한 야외활동 시간을 1시간 이상 잃어버린다고 주장한다. 반면, 여름이 되면 중부 유럽인들처럼 늦은 시간까지 해를 즐길 수 있다. 대신 이른 아침의 햇살을 일정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있지만 본격적인 경제활동 시작보다 이른 시간이라 부담이 덜하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스페인의 중부유럽시간대를 쓰게 되면 아침 이른 시간의 해를 빌려와 저녁 늦게까지 쓰는 형태의 생활을 하게 되는데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다는 입장이다.
식사시간에 관한 지적에 대해 중부유럽시간대(CET) 찬성론자들은 시간대를 변경하여 다른 나라처럼 1시에 점심을 먹는다고 해도 결국 실질적인 태양 식사 시간은 똑같기 때문에 변경의 무의미함을 지적한다. 대신 시간대를 변경할 경우 근로시간을 포함한 각종 조정 비용뿐만 아니라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의 주요 국가들과 증시, 금융기관 영업시간이 달라져 금융시장에 적지 않은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 우려한다. 관광지인 지중해 지역의 여름 해가 짧아지면 관광객들로부터 매력을 잃게 되어 스페인의 핵심산업인 관광산업(유흥, 오락포함)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해가 일찍 짐에 따라 가정용 전력사용량도 늘게 될 것으로 본다.
썸머타임(Summer Time) 해제, 단일 시간대를 결정해야 하는 스페인의 선택은?
스페인을 비롯한 EU회원국들은 흔히 서머타임이라고 불리는 일광절약시간제를 운용해 왔다. 서머타임제는 여름철에 표준시를 1시간 앞당기는 제도로 긴 해를 최대한 이용해 에너지 소비를 줄이자는 취지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EU는 2001년 서머타임제를 3월 마지막 일요일에 시작해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끝이 나도록 의무화하였다. 단일시장 거래 및 에너지 효율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유럽의 서머타임은 매년 3월 마지막 일요일에 시작해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끝난다. 스페인은 석유파동으로 힘들었던 1974년 처음 서머타임제를 도입했고 1981년 법제화하였다. 에너지 절약의 목적으로 시작되었던 서머타임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실효성에 대한 논쟁이 커졌고 마침내 유럽의회는 2019.3.26.(현지시간) 찬성 410표, 반대 192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서머타임을 2021년에 폐지하는 방안을 승인했다.유럽의회가 승인한 서머타임 폐지안은 회원국들에게 '서머타임'에 맞춘 시계를 계속 둘지 말지에 대한 선택권을 줬다. 2021년 3~10월 마지막 서머타임에 맞춘 시계를 그대로 둬도 되고, 종전처럼 시침을 되돌려도 된다. 스페인도 하계시간(GMT+2)과 동계시간(GMT+1) 중 한 시간대를 선택해야 한다. 서마타임 옹호론자들은 서머타임이 에너지를 절약해줄 뿐 아니라 낮시간에 사람들의 외부 활동을 늘려 건강과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서머타임의 에너지 절약 효과가 미미하고 너무 이른 시간의 신체활동은 오히려 건강에 해롭다고 지적한다. 1년에 두 차례 시간을 바꾸는 데 따른 혼란을 문제 삼는 이들도 있다.
스페인에너지절약다변화연구소(IDEA)는 이전에는 서머타임제 적용으로 대략 전체 전력사용량의 5% 까지 절약할 수 있다고 추정한 바 있으나, 조사방식에 따라 변수가 크기 때문에 공식적인 자료는 부재하다고 볼 수 있다. 유럽의회도 서머타임제로 에너지 소비량을 일정부문 절약할 수 있으나 국가별로 사정이 다르고 정확한 측정이 어렵다고 결론 내린 바 있다. EU는 경제모델이 원유 사용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제조업 기반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전환되었고, LED등 기기들의 에너지 효율성이 높아져 서머타임제의 당위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것 같다.
2018년 11월 스페인사회연구소(CIS)가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62.5%의 스페인 사람들은 서머타임제 폐지에 찬성했고, 하계(GMT+2)와 동계(GMT+1) 중에서는 65.4%가 하계 시간대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페이누정부는 표준시 설정과 관련하여 2021년까지는 일단 최대한 지켜보겠다는 신중한 자세다.
El 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