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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캔버슬릭 Jun 08. 2023

처음으로 느끼는 외로움 [1]

인생은 외로움을 느끼고 시작한다.

'사랑과 연인에 관하여'


살아오면서 외롭다고 느껴본 적 있는가?


우리는 일정한 시기가 되면 양육자의 품에서 벗어나 친구를 만나는 시기가 온다. 가족이 아닌 타인과 관계를 맷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아이들은 이 시기가 아주 많이 낯설 것이다. 자신의 생각에 좀처럼 동의해주지 않으며 자신의 물건을 함부로 사용한다던가 선약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 약속을 하는 등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양육자의 관계에서는 좀처럼 쉽게 나타나지 않는 혼돈이 친구들을 만나면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외로움이 무엇인지 조금씩 느끼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느끼면서 모든 사람이 나의 편이 아님을 알 때 스스로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순간순간마다 대처해야 하는 방법도 모르는데 매일매일 하루하루는 반복되는 상황이 너무나도 혼란스럽다. 그 아이가 느끼는 외로움은 분명 물리적인 분리에서 발생하는 외로움이 아닐 것이다. 친구들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놀이를 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아무도 내 편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에 찾아오는 이상한 기분이다.


 또래 친구와 관계가 확장되면서 양육자와의 관계는 멀어진다. 아이의 양육에 관한 많은 책중에 주목을 이끌어내진 못했지만 나름의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주디스 리치 해리스는 '양육가설'에서는 아이의 성장과정에서 아이의 태어난 본성이 기본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또래친구들이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부모의 명령과 지시가 강압적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부모의 말에 따라야 하는지 반항을 해도 되는지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세상의 시각이 내부적인 시선에서 다양한 관점의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신선함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과 해도 되는 것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양육자의 품에서 벗어나보면 너무나도 다양한 가치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또래 집단을 통해서 알아가는 것이다.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고 게임을 하는 친구를 보며 놀래기도 하며 저녁 9시가 넘어서도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혼내지 않는 친구의 부모를 보며 그게 어떻게 문제가 되지 않는지 신기해하는 것이다. 태어나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규정 외의 생각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무엇이 맞는지 내적인 갈등이 생겨나는 시기이다. 그렇게 자리 잡힌 변화된 나의 생각과 양육자의 규칙이 상충하며 점점 그들의 이견은 커지며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 맞고 틀린지에 대한 논의보다는 그들 서로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에 서로가 거부감을 가지며 논쟁이 이어지고 대화의 단절이 생기는 극으로 갈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에서 찾아오는 외로움도  있다.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면 타인의 명령이나 제안에 대해서 더욱 강하게 판단하는 시기가 온다. 사춘기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인정해 달라고 하는 시기다. 아이 스스로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강요받거나 명령받지 않아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양육자의 계속되는 명령과 지시는 반항심을 더욱 크게 만든다. 그리고 이 사춘기에는 양육자나 타인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시기이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요구하고 요청한 이후에 생각보다 아직 어리숙함을 인정하고 나면 그 순간에 많은 외로움이 다가온다. 나의 멋진 아이디어나 좋은 방법을 통해서 혼자서 무엇인가를 시도해 보지만 결국 실패로 끝날 때 허탈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무능력함에서 찾아오는 우울함이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사회적인 문화로 인해서 생겨나는 외로움도 있다.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육체적인 강인함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끼리 모여 집단지성을 이루고 살며 지능을 통한 강임함을 유지하고 살았다. 그 삶은 그들의 공통적인 규칙을 만들어 조직이 오랫동안 유지되는데 첫 번째 목표로 삼았고 그에 반하는 생각이나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그 무리에서 퇴출시켜 버렸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만년 전 그 시절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세계 각 국가나 도시에 살거나 오지에 사는 소수민족들까지 그들이 만들어 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보통 사람을 죽이거나 남의 재산에 피해를 주는 일들은 대부분 다 허용하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노출이 심한 옷을 입지 않는다던가, 아무 곳에서나 애정표현을 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그 무리에서 통용되는 문화에 따른 세부적인 규칙이 존재한다. 규칙을 따라가지 못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무리에서 지내게 되면 퇴출되어 버리는 외로움은 정상적인 행동이 비정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외로움이다.

 

 조금 더 미시적으로는 회사 내의 조직에서는 눈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하나의 그 무리만의 규칙이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지만 그래야 하는 것이 그들만의 룰이고 법칙이라 그에 준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경우, 그 사람은 그 조직에서 무시당하고 심지어는 버림받기까지 한다. 그 사람은 무려 상사에게 권하지도 않고 커피를 혼자 마시는 엄청난 실례를 범했을 것이다. 조직에서 통용되는 행동이나 표현들은 그 조직 내에서 허용되거나 회사 같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모인 조직 내에서만 배척당하는 행동일 수 있다. 무조건 그러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른 조직에서도 똑같은 취급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비슷한 사람들과 같이 지내는 것을 선호한다. 어떤 도시에서 살아갈 때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아주 버릇없다고 생각하는 사회가 있다. 그렇다고 모든 도시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개인의 자유를 가장 우선시하는 미국이나 타인의 배려가 생활인 일본이나 사람들이 무리 지어 살아가는 비슷한 환경이지만 그들은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그 사회에서만 통용되는 행위들을 제한하는 것이다. 상의를 탈의하고 다니는 남자들을 보면서 미쳤다고 말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남자들이 상의를 벗고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곳도 있듯이 말이다.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무리에서 통용되는 관습이나 규칙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무리의 문화가 좀 더 퇴화되었다거나 보수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결국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니라 그 사회가 그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끼리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고 그 속에서 아주 정교하게 짜여진 규칙으로 모두가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틀을 마련하게 된다. 조금이라도 반하는 생각을 가졌다면 비정상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몰아가고 정신이상으로 의학적 치료를 권하기도 한다. 자신들의 생각들로 가득찬 세상을 만들고 그들이 편하고 안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수준까지 유지하기 위해 많은 정상적인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내가 가진 생각과 비슷한 성향을 하루 빨리 찾아서 안정감을 찾고 외로움을 끊어야하는 것이 결국 나의 노력이 되어야하는 사실이 힘든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기 힘든 이야기를 꺼낼 때는 외로움에 이겨낼 자신이 있어야 한다. 지구는 태양을 돌고 있다는 코페루니코스의 지동설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 시대에서는 아주 획기적인 이야기였다. 약 2000년간 모두가 그렇다고 믿던 하나의 이론을 뒤엎어버리고 새로운 논리를 전재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다들 미쳤다고 말했다. 아무도 그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믿어주지 않았던 시기가 있다. 사람들은 지식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과학분야에서는 과학자들이 아주 정교하고 정밀한 실험을 통해서 증명하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며 믿는다. 철학자 칸트는 자신의 저서 '순수이성비판' 서문에 코페루니코스적 전환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외부의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에서 우리 내부에서 대상의 개념을 구현한다고 봤던 것처럼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생각해 낸 코페루니코스의 발상을 자신의 생각과 연관을 시킨 것이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일반 대중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생소하고 복잡한 이론이라서 모두가 그를 이상한 철학자쯤으로 치부하고 마는 것이다. 철학자 니체도 그랬고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도 그랬듯이 그들의 논리를 쉽게 대중에게 발표하지 못했던 것은 종교에 대항한다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맞이하여야만 한다는 곳을 잘 알고 있어서 일 것이다. 아무도 그들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그것을 하나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괴물이라고 말한다면 아주 오랜 시간 고민하며 연구하고 증명해 낸 사람이 받는 상처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물질의 부재가 차이를 만든다.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한 지금 시기에는 물질적으로 풍요롭다는 것이 삶의 가장 큰 목표가 된다. 남들보다 더 많은 돈으로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이 최고의 낙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알랭드 보통의 ‘불안’에서 불안의 원인을 사회적 지휘에서 가장 먼저 찾는다. 과거의 계급사회에서는 아무런 노력이 없어도 사회적 지휘가 존재했다. 현대 사회는 계급은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각자 노력해서 공평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앞에 서있는 사람의 사회적 지휘를 구분할 수 없으며 그의 물질적 재능도 한눈에 알아보기 쉽지 않다. 자신을 더욱 빛나게 하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우월감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그들이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그 차이를 명백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좋고 더 넓은 집, 차를 타고 다니며 낡고 좁은 집에 사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더 많은 여가를 즐기며 하나의 여가도 즐기기 버거운 사람들을 비웃어가면서 그 차이를 만끽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격차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지휘가 외로움의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다. 가진 사람들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나누어지며 서로의 생각을 무시하고 차별하기 시작하면서 서로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로움이 발생한다. 물질이 매개가 되어 서로 간의 차이를 만들어 내지만 결국 서로의 생각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배척해 나가는 것이다.


 외로움은 삶에 있어서 흔하게 찾아오는 감정이다. 어릴 적 분리 불안은 느끼기 시작해서 사람들로부터 외로움을 느끼면 자신 가치를 낮게 평가하게 된다.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배척당하면서 자존감은 낮아진다. 이러한 외로움으로부터 우리는 끊임없이 그 무리에 속하기 위한 처절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가진 자의 무리에 들어 나의 소속감으로 자존감을 높이는 것과 같이 말이다. 좋은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여행을 다니며 SNS를 하는 것이 아무 의도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사회적 무리에서 배척당하지 않고 남들보다 높은 우위를 점하려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외로움을 느끼면 누군가와 함께 하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길을 걸으며 혼자서 대화를 하는 자신을 느낄때 너무나도 속상하고 슬픈 감정이 생겨날 수 있다. 나에게만 이런 슬픈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으며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이는 것이다. 삶에서 외로움을 처음 느끼는 순간이나 나이가 들어 느끼는 것이나 본인에게 느껴지는 그 외로움은 변하지 않고 우울하고 슬픈 감정이다. 그 감정이 지속되면 우울증이 찾아오기도 하며 대인기피가 생길지도 모른다. 날 위해 웃어주고 날 위해 대화해주는 나에게만큼 친절하게 상냥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많다면 그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삶의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단 한사람의 관심만으로도 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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