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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코 Jan 24. 2024

연말 되새김질 하는 법

12월 월말정산




눈 오는 12월



올 겨울은 유독 눈이 잦다. 계절 중 겨울을 가장(실은 아주 많이) 싫어하지만 눈 오는 날의 설렘까지 부정하고 싶진 않다. 12월 어느 날, 눈이 오길래 어그부츠를 신고 밖으로 나섰다. 목적지는 없었고 괜히 동네를 털레털레 돌아다니다 마트에 들어가, 서로 사달라 아웅다웅하는 물건들 틈에서 일용할 양식 몇 개를 건져왔다. 백수에 가까운 프리랜서인 나에게는 이런 별 것 없는 일상이 겨우내 보통이었는데, 이날은 단지 눈이 소복이 쌓였다는 이유만으로 꽤 즐거웠더랬다.


한밤 중 뽀득거리며 눈 위를 걷을 때면 발자국 소리가 아파트 단지를 온통 울리는 기분이 든다. 새해가 된 지 한참인데도, 고요했던 23년 겨울 위로 내디뎠던 몇 걸음이 종종 떠오른다. 여태 녹지도 않아 마음속에서 뽀득거리고 왕왕 울린다. 그래서 기억에 남기고 싶은 연말을 <영화/영상/장소/음악/소비> 5가지로 나누어 되새김질해보려고 한다. 물론 벌써 1월도 다 지나가고 있어 조금 늦긴 했지만 말이다.







기억에 남는 영화 <괴물>

*스포주의

#영화 #괴물 #고레에다히로카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을 봤다.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부터 보고 싶었던 작품인데 여기저기서 호평이 자자해 안 볼 수가 없었다. 영화는 싱글맘인 사오리의 시점에서 시작돼 담임선생님인 호리 시점, 사오리의 아들 미나토의 시점으로 각각 진행된다. 영화가 전개될수록 앞서 보았을 때 납득하기 어려웠던 인물의 이면이 드러나고, 퍼즐의 빈 조각이 채워지며 스토리의 빈틈이 채워진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두 가지. 하나는 교장선생님과 미나토가 함께 트럼본을 부는 씬이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가진 두 사람은 텅 빈 교실에서 있는 힘껏 숨을 내뱉는다. 어설픈 바람소리는 점점 큰 울림으로 변하고 열린 창문 밖으로 멀리 퍼져나간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 두 사람이 말하지 않은 사실로부터 상처를 받은 미나토의 담임선생님 호리는 좌절한 채 학교 지붕 위에 서있다. 멀리 뱃고동 소리처럼 들려오는 트럼본 소리를 들으며.


또 다른 하나는 사오리와 호리가 태풍을 뚫고 사라진 미나토를 찾아다니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미나토가 평소에 자주 놀던 버려진 기차까지 간신히 도달했지만 기차는 태풍 탓에 뒤집어져 있었다. 창문 위로 흙탕물과 진흙이 쌓여서 내부는 보이지 않고 둘은 미나토를 찾기 위해 흙탕물을 계속해서 밀어내고 퍼낸다. 하지만 퍼붓는 비 탓에 창문 너머는 잘 보이지 않는다. 치우고 또 치워도 흙탕물이 자꾸만 창문을 덮는다. 미나토가 만든 기차 속 세상은 어른들에게 보일 듯 보이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그래서 영화에서 말하는 괴물은 누구인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또 아이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지도.







기억에 남는 영상 <선우정아 - 포옹>



12월 22일 망원 <영카이브>에서 선우정아 님의 신곡 <포옹>의 이벤트가 열렸다. 일명 <포옹부스>는 3일 동안 운영됐는데, 나와 친구들은 이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사진을 찍으러 들어갔다가 얼떨결에 이벤트에 참여했다. 직원분의 설명에 따르면, 포옹이라는 곡 제목처럼 서로 껴안고 사진을 찍으면 추후 만들어질 뮤직비디오에 우리 영상이 들어가게 된다고 했다. 물론 촬영 비용도 받지 않았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최선을 다해서 포옹하며(?) 사진을 찍었다.


12월 31일, 포옹의 뮤직비디오가 나왔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 나와 친구들도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5초 정도 화면에 나왔다 사라지는 우리 모습이 신기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다들 재밌어했다. 평범하게 만나 놀던 어떤 날의 추억이 오피셜 한 영상으로 남게 될 줄은 몰랐다. 그날 우연히 그곳에 가게 된 것에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https://youtu.be/2Z_xQTkd-R0?feature=shared







기억에 남는 장소 <책바>


숙원사업과도 같았던 <책바> 방문하기. 이곳에 가보겠노라고 얘기한 지가 2년도 넘었는데 이제야 다녀왔다. 원래 연희동에 있었을 때부터 너무나 궁금했던 곳인데 지금은 망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초록초록한 문과 초록초록한 메뉴판이 반겨주는 <책바>는 말 그대로 책을 읽으며 술을 마시는 곳이다. 내부엔 꽤 커다란 책장이 있고 또 책상마다 스탠드가 있어서 그런지 매장이라기 보단 누군가의 작업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두들 이 아늑한 공간에 앉아 술을 주문하고 조용히 책을 읽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했다. 혼자 온 손님들도 꽤 많았다는 사실. 알쓰인 나는 무알콜 메뉴를 주문하고 책장에서 아무 에세이집 하나를 골라 자리에 앉았다.



계절이 겨울인 탓인지 아늑한 분위기 탓인지 아님 책을 읽은 탓인지 점점 몸이 노곤해졌다. 와중에 무알콜을 주문해 다행이었다. 알코올을 들이부었다면 꾸벅꾸벅 졸았을지도. 요즘 집중력도 떨어지고 활자 읽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서 훈련 삼아 벽돌책을 하나 읽고 있다. <책바>엔 독서실처럼 벽을 마주 보는 작은 책상이 있었는데, 왠지 그곳에서라면 벽돌책도 꽤나 몰입하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조만간 가방에 책 한 권 덜렁 담아 <책바>에 가볼 생각이다. 또 한 번 가고 싶은 장소가 생겼다는 건 다가올 주말을, 다음 주를, 다른 계절을 기대하게 한다. 파워 집순이도 침대 밖으로 나와 돌아다녀야 하는 이유.







기억에 남는 음악 <On This Road(길 닦음)>


정재일 음악감독의 콘서트 <Listen>을 보기 위해 굉장히 오랜만에 세종문화회관을 다녀왔다. 그는 영화 <옥자>, <기생충>, <오징어 게임>의 음악 감독으로서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일전에 그가 음악을 담당한 <오버 데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오프라인으로 그의 음악을 듣는 건 나름 두 번째라고 해야 할지.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은 <On This Road>였다. 프로그램 순서상 기생충 OST를 여러 곡 들은 뒤 곧바로 이어진 곡이었는데, 분위기가 상반된 노래라 도입부터 빨려 들어가 듯 집중했다. 숭고하면서도 슬픔과 회환이 묻어나 굉장히 집중해서 들었던 기억. 이후 곡 설명을 듣고 아, 하고 납득했다. 떠나보내는 이를 위해 부르는 노래라 한다(정확한 워딩은 아닐 수 있음). 현장에선 곡이 끝날 때까지 내내 온몸에 소름이 돋은 채였는데, 집으로 돌아와 음원으로 들으니 그 정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서 라이브의 힘을 또 한 번 느꼈다는 이야기.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은 금전 압박으로 인해 2층을 예매했는데 소리가 더 퍼져나가지 못하고 갇혀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층이라면 달랐을까? 취업하면 뭐든 맨 앞에서 보겠다 다짐 또 다짐.





https://youtu.be/VclVlTIY34s?feature=shared







기억에 남는 소비 <일기장>

#7321디자인



23년 7월쯤부터 사용하고 있던 일기장이 몇 장 남지 않았는데 미루고 미루다 부랴부랴 교보문고에 가 일기장을 구매했다. 매년 연말이면 다이어리를 샀었는데 두 달을 못 넘겨 처박아두고 열어볼 생각도 하지 않아서 이젠 스케줄 적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최근 반년 넘게 열심히 쓰고 있는 일기를 24년에도 꾸준히 써보자는 생각. 어차피 스케줄은 휴대폰 캘린더로 관리하는 게 더 편하기도 하고. 맘에 드는 게 없어서 핫트랙스를 두 바퀴쯤 돌고 나서야 발견한 연한 하늘색의 노트.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스투시 로고 스티커를 붙여줬다.


일기를 쓰는 건 확실히 인생에 도움이 된다. 멋없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방어기제를 발휘해 진짜 내 속마음과 다른 글자를 적어 내려 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의식적으로 내용을 검토하고 고친다. '아니, 구질구질해도 이게 진짜야' 하는 마음으로 줄을 긋고 수정한다. 매일 부정적 감정만 쏟아내다가도 기분이 좋은 날엔 아낌없이 나를 북돋아준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칭찬하고 앞으로 다가올 산뜻한 미래를 속삭여준다. 그렇게 품고 쓰다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대해준다.


누군가 내 일기장을 본다면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정상은 아니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그런 이중적인 면 때문에 더더욱 일기를 쓴다. 인생이 더딜 땐 풀썩 주저앉아 구구절절 한탄하는 내 얘기를 들어주고 발걸음이 가벼울 땐 뒤에서 불어오는 순풍이 되어주는 일기장. 그러니 올해도 꾸준히 일기를 써보자!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꼽아 연말을 되새김질해보니 23년 12월을 더 오래 기억할 것 같아 좋다. 남은 1월에도 가고 싶은 곳을 찾고,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고, 갖고 싶었던 물건을 사야지.


여러분은 어떤 12월을 보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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