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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코 Dec 09. 2023

불타는 취준생, 글쓰기로 물 붓기

11월 월말정산




또, 또, 브런치


구독자님들 도망가지 마세요 제대로 모시겠읍니다

며칠 전,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오랜만에 브런치에 들어와 글을 싹 밀었다. 더 이상 쓸 흥미가 나지 않은지 오래였던 <첫 유럽 여행기>와 심연의 나를 적어 내려 간 <불안의 책>. 고맙게도 그중 몇은 다음 메인에 올라가 나를 북돋아주었다. (여행기는 좀 더 압축해서 10편 내외로 재연재 예정)


곧 새해임을 의식한 건 아니지만! 브런치를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사실 그간 소설 쓰는 것에 심취해 있었는데 여태 써오던 글이 너무 못생겨서 구석구석 죄다 헐뜯고 머리도 쥐어뜯고(?) 하다가 브런치로 도망온 것이다...ㅎ 나약하다.


새롭게 시작하는 브런치에선 혼자 사는 독거청년 라이프에 대한 글을 연재하려고 한다. 세이브 원고 3편쯤 만들고 매거진 개설하면 아마 2월에나 시작할 것 같다. 그때까진 월말정산 겸 일상 글을 남길 예정. 이건 높은 확률로 브런치스럽지 않은 글(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그렇다)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보통의 나를 기록하는 것도 필요하니까 편하게 써봐야지. 어쨌든 새롭게 시작하는 브런치의 첫 글은 11월 정산이 되겠다.  





불타는 자기소개서


최근에 가장 많이 쓴 글은 자기소개서. 왜냐면 나는 지난여름 대차게 퇴사했기 때문이다. 회사를 뛰쳐나오면서 가장 두려웠던 건, 자소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이 지난한 과정이다. 환승 이직을 했다면 참 좋았겠지만 전 직장을 다니는 동안엔 야근에 지쳐 이직 준비할 엄두를 못 냈다. 또 연차 쓰고 면접 보는 일도 왠지 내키지가 않았다. 어디든 이 한 몸 받아줄 곳은 있다고 믿으며 다시 백수가 된 지 반년이 다 되어간다. 1월에는 꼬옥 다시 경제활동인구가 되고 싶다. 돈은 안 버는데 씀씀이는 그대로라 적잖이 곤란.


다시 취업 준비를 하며 느낀 건, 나는 내 일을 참 좋아한다는 것이다. 포트폴리오에 담을 작업물을 하나씩 살펴보니 가장 재밌어했던 순간과 신경 썼던 포인트, 어려웠던 문제들과 그걸 해결했던 방법 등 많은 것이 떠올랐다. 뭣도 모르면서 맨땅에 헤딩하던 20대의 내가 귀엽다. 아무튼 손가락에 불나게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다.



내가 몸 담은 업계는 포트폴리오로 승부를 보는 탓에 경력직이 된 이후론 영어 시험을 본 적이 없었다. 한데 생각만큼 나와 맞는 채용이 많지 않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오픽을 땄다. IH를 목표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정말 IH를 받다니. 퇴사한 후 이렇다 할 성취감 없이 흘러온 탓에 약간의 무기력증이 생겼었는데, 영어 점수 하나로 바로 타파했다. 빠샤. 영잘알에겐 가벼운 점수겠지만, 정말 오랜만에 본 영어 시험이고 해외 출장에서 어버버하던 것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다시 봐도 너무 뿌듯하다. 땡큐 에바!




서류 탈락의 슬픔에 절여진 어느 날, 수능 기사를 보고 재수 때 쓰던 스터디 플래너를 꺼냈다. 누군가 나에게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살았던 때가 언제냐 물으면 0.1초도 고민하지 않고 재수 시절이라 말할 것이다. 그때만큼 뭔가에 몰두하고 내 모든 걸 갈아 넣었던 적이 없다. 그 덕에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고 인생에서 가장 큰 성취감을 맛봤다. 6시간 20분 공부한 날을 막장이라 평가한 것을 보니 기가 막히다. 매일 6시간 20분씩 뭐라도 하면 끝내주는 인간이 될 텐데. 이젠 몸이 낡고 지쳐서 그렇게 앉아있지도 못하겠다.





와중에 친구가 취업을 해서 오랜만에 만났는데, 밥을 먹고 난 뒤 전통찻집에서 뜨끈한 십전대보차를 마셨다. 취준생은 거절당할 마음의 준비를 하느라 대체로 기운이 없기 때문에 몸에 좋은 걸 먹어야 한다. 온갖 약재 탓에 씁쓸할 줄 알았지만 취업 시장이 더 씁쓸한 탓일까..? 그다지 쓰지 않았다.





글쓰기로 물 붓기



이번달 가장 인상 깊게 본 콘텐츠. 10월에 부산국제영화제를 다녀왔는데 그때 못 본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가 넷플릭스에 있다는 걸 알게 되어 후루룩 봤다. 봉준호 감독이 20대 때 몸 담았던 영화 단체 '노란문'에 대한 이야기다. 영상 말미에는 당시 함께 모임을 꾸려 영화를 공부하던 분들이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는데, 수학을 가르치거나 인테리어업을 하는 등 영화와 무관한 일을 하는 분들이 많았다. 직업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어떤가. 재고 따질 것 없이 무언가에 몰입했던 날것의 시간은 단순한 기억 그 이상이다.


남의 추억에 덩달아 아련해져서 나의 대학시절을 떠올려봤다. 노란문을 보고 나니 더 후회되는 것은 교내 문학회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대학교 4학년이었을까, 중앙도서관으로 들어가는 문 옆에 디자인이 귀여운 작은 책이 수십 권이 쌓여있는 걸 발견했다. 대학내일 같은 잡지나 학교 홍보물이겠거니 생각하며 지나치려는데 표지에서 '문학'이라는 글자를 봤다. 그리고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거기 가만히 서있었다.


'맞아. 나 소설을 쓰고 싶었지.'


스무 살에 첫 소설을 썼다. 불성실한 인형 뽑기 가게 알바생과 CCTV로 하루종일 알바생을 감시하는 사장, 그리고 그곳에 오는 폐지 줍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 소설을 썼다는 사실조차 내내 잊고 살았던 것이다. 그때라도 얼마든지 문학회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늦었다 생각했고, 형편없는 글을 들고 갈 용기가 없었다. 나는 문집을 한 권 챙겨 와 놓고도 두려운 마음에 페이지를 못 넘겼다. 여전히 그 책을 읽지 못한 채 책장 한구석에 모셔만 두고 있다.




취업에 골머리를 앓다 속이 뜨끈뜨끈해질 때면 글을 쓴다. 뭐가 됐든 일단 쓰다 보면 심신이 차분해지고, 그렇게 감정이 차단된 상태의 나를 선호한다. 퇴사한 후 줄기차게 소설을 썼다. 사실 3년 전쯤부터 계속 시동을 걸어왔고 이제야 겨우 단편 분량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간 글쓰기에 정말 집착하고 몰두했는지 묻는다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언제나 완벽보단 완성임을 알면서도 제대로 마무리를 못한 채 버려두었다. 다시 돌아갈 것임을 알지만, 이럴 때마다 어딘지 모를 도착지로부터 몇 걸음 멀어지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말할 필요도 없이 나의 도피처는 언제나 글쓰기. 가장 사랑하는 일이자 가장 괴로워하는 일. 언제든 나를 기다리는, 안식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무덤 같은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글쓰기에서 도망쳐 다시 글쓰기로 돌아온 것이다. 브런치에 글을 남기면 누군가 읽는다는 사실이 일상에 소소한 성취감을 불어넣는다. 성취감 부재에 허덕이는 나는 그걸 동력 삼아 움직이고 싶어 삐걱거리는 중이다.





불타오르고 물 붓기를 반복한 11월. 남은 12월과 다가올 새해에 해야 할 일 1순위는 취업, 2순위는 브런치, 3순위는 못 다 쓴 소설이 되시겠다. 취업도 자기소개서를 쓰는 일이므로 결국 셋 다 글이다. 이 지난한 시간을 지나면 언제나처럼 흥미로운 일로 돈을 벌고 퇴근 후에는 글쓰기로 하루를 마무리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난 꽤 행복한 사람 아닐까.


비록 지금은 허공에 대고 외치는 기분이지만, 내가 몰두한 시간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반드시 결과로 나타난다. 단지 시차가 있을 뿐. 쓰다 보니 결론이 반성과 다짐이 되어버렸지만 연말은 다 그런 거지 뭐. 새해엔 기쁜 소식으로 돌아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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