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월말정산
매해 2월은 시간이 참 빨리 지나간다. 명절이 껴있기도 하고 실제로 날이 부족하기도 하고. 이번달에도 어김없이 취준을 했고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토익 시험도 보았다. 바쁨을 자처했지만 이렇다 할 결과가 아직 주어지지 않아서인지 그냥 침대에 누워서 보냈다는 인상을 지우긴 어려울 듯하다. 그래서 더더욱 월말정산 글이 필요한 것! 2월에도 기억에 남는 <소비/책/문장/장소/음악>으로 한 달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나름 여기저기 잘 돌아다닌 2월이었다.
#그랑핸드 #향수
사쉐를 사러 간다는 친구를 쫓아 얼떨결에 들어간 그랑핸드. 온갖 향이 뒤섞인 매장 향기에 살짝 머리가 아팠지만 정신을 차리고 하나씩 시향 하다 보니 나올 때쯤엔 제 손에 향수가 들려있었습니다..
머스크 베이스의 향이라면 뭐든 좋아하는 편이라 머스크가 들어간 것 위주로 이것저것 시향해 봤다. 맘에 들었던 건 Violette와 Marine Orchid. 고민하다 Violette 멀티 퍼퓸 100ml를 구매했다.
오래전 어느 2월, 친구를 따라 향수를 직접 만드는 원데이 클래스를 한 적이 있다. 그땐 심각할 정도로 방에만 처박혀 지내던 시절이라 향수를 뿌리고 나갈 일이 전혀 없었거니와, 애초에 몸에 향수를 잘 뿌리지 않던 때라 화장대 위에 덩그러니 딱 하나 놓인 작은 향수병이 그렇게 이상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이불과 옷장, 방 곳곳에 향수를 뿌리고는 아마도 이렇게 나 혼자 맡는 향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재밌게도 그 향수가 집에 들어온 이후 자꾸만 밖에 나갈 일이 생겼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친해졌고 또 만나게 되고 그런 시시콜콜한 일이 반복되자 100ml도 되지 않는 작은 향수병은 금방 바닥을 보였다. 그때부터 새로운 향을 집에 들일 때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될 것 같다는 기대를 품게 된다. 바람이면서 또 일종의 의식 같기도 하다.
원데이 클래스에서 향수를 다 만들고 나면 이름을 지어줘야 했는데 나는 가장 맘에 든 향료의 이름을 따 Sea Salt라 적었다. 짭조름한 바다 향은 아니었고 프레쉬하지만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여름 밤바람 같은 향기였다. 텅 빈 Sea Salt 향수는 여전히 내 화장대 위에 있다. 이제는 희미한 잔향조차 나지 않는 빈병이지만 이런저런 기억이 묻어서 어쩐지 버릴 수가 없다.
리코라 이름 붙인 그랑핸드 향수는 사라질 때쯤 기분 좋은 비누향을 남겨서 좋다. 이 녀석은 또 어떤 만남을 가져다줄까? 향기와 함께 새로이 길을 나서길 기대해 본다.
#밀리의서재 #크레마
2월부터 밀리의 서재 구독을 시작했다. 세상에 쓸데없는 책 구매란 없다고 믿는 책 덕후지만 책장에 종이책이 잔뜩 꽂혀있어서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경우라면 말이 다르다. 더 이상의 종이책 충동구매는 있어선 안 되기 때문에 e북을 읽어보기로. 내 기준에서 종이책으로 간직하기엔 조금 아쉬운(?), 즉 한 번 찐하게 읽는 것으로 충분한 책들은 e북으로 접하려는 것이다. 첫 책은 줄리아 켈러의 <퀴팅>으로 정했다.
<퀴팅>은 말 그대로 '그만두는 것'의 유용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년의 내가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지난해 오랜 고민 끝에 퀴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퀴팅 후 내 삶이 얼마나 발전했느냐 누군가 묻는다면 1초의 고민도 없이 단 한 가지도 발전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난 명확하게 정체되었고, 심지어 어디에 정박하고 있는지도 스스로 가늠하지 못하는 상태다. 다만, 그 멈춤이 필요했다는 것엔 확신을 가진 채 회사를 관뒀고 여전히 향할 곳을 고민 중이다.
하지만 퀴팅은 장점도 명확하다. 길이 주어진다면 전력질주 해볼 에너지를 잔뜩 충전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니까. 목적지가 정해지기를 기다리며 열심히 시동을 걸어본다. 밀리의 서재 구독도 했겠다 3월 달엔 좀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책 리뷰를 남길 수 있기를!
#금전수 #일기
집 한 구석엔 우리 집의 유일한 식물 금전수 한그루가 있다. 관심을 주지 않을수록(?) 잘 자라는 탓에 3년 넘게 버티고 있는 기특한 녀석. 지난달, 웃자란 금전수 가지들을 잘라내 화병에 담갔다. 댕강 목이 잘린 듯한 본체는 어떻게든 또 자라나겠으나, 물에 담가둔 가지들에서 뿌리가 나올지 걱정이었다.
3주는 아무 일 없이 지났다. 인터넷에선 두 달이면 다시 땅에 심을 정도로 뿌리가 자란다고 했는데. 그럼 3주 째엔 날카로운 단면이 울퉁불퉁해질 정도는 되어야 이치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한 걸까? 하지만 한 치의 의심도 들지 않는 푸른 이파리를 믿어보기로 했고, 또 한 주가 흐른 뒤 겨우 몇 미리가 자란 덕에 안심할 수 있었다.
이번 주말, 내가 집을 비운 이틀 사이 뿌리가 1cm 남짓 나왔다. 움트기까지 꼬박 한 달이 걸리더니 이젠 금방이라도 땅에 심어야 할 것처럼 돌아서면 자라 있다.
어느 지점에 이르기까지 달라지는 건 오직 시간 하나뿐인 일들이 있다. 내가 믿는 건 주로 그런 것들이다.
#방탈출 #티켓투이스케이프 #비트포비아
어쩌다 보니 한 달에 방탈출을 두 번이나 하게 되었다. 하나는 '티켓투이스케이프'의 <삼일보육원>, 다른 하나는 '비트포비아 홍대던전3'의 <이미지 세탁소>. 둘 다 꽃길로 유명한 테마라 굉장히 기대했었다. 특히 삼일보육원은 약한 공포 테마인데, 공포 테마를 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어떤 장치가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결론은 나에게도 두 테마 모두 꽃길이었다. 힌트를 꽤 쓰고 탈출하긴 했지만 스토리를 끝까지 보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겠음.
생각해 보면 방탈출이라는 놀이는 개념부터 재밌다. 사람들은 스스로 방에 갇히고 머리를 쥐어짜 내야만 그곳을 나갈 수 있다. 1시간 남짓한 시간 압박까지 주어지고 때론 공포 테마로 깜짝 놀라게 하는 장치가 수두룩한 공간에 그것도 꽤나 거금을 주고 들어간다. 아마 힌트를 최소한으로 쓰고 탈출했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에 중독이 되는 것이겠지. 어쨌든, 인간은 자꾸만 이런 놀이를 만들어낸다. 재밌어!
#아이유 #TheWinning
2월 20일 아이유의 미니앨범 <The Winning>이 발매됐다. 그중 내 최애곡은 '관객이 될게'다. 음원이 공개된 이후 계속 한곡 반복 중인 곡! 가사가 긍정적이라서 좋다. 요즘은 기분을 가라앉게 하는 침울한 노래는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하는 중이다.
막이 오르는 순간
조금 철이 없길 바라
놀아 어린아이처럼
"그건 너답지 않아."
"나다운 게 뭔데!!"
청춘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클리셰 잔뜩 묻은 대사가 머릿속에서 맴도는 2월이었다. 회사를 관둔 후 남아도는 게 시간이다 보니 나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지나치게 많이 주어졌다. 이건 대체로 단점으로 작용한다. 생각의 생각의 생각의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나다운 게 뭔지 도무지 모르겠는 경지에 이르기 때문.
요즘엔 내가 너무 멋없다는 소리를 자꾸만 되뇌었다. 들을 사람은 나밖에 없고 콕 집어 듣기 싫은 소리를 해야 하는 이유는 전혀 없는데. 그런데도 멋없다는 말로 스스로를 깎고 또 깎았다. 그런 와중에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어서 감사했다.
그래도 내가 끌리는 대로 살아봐야지. 무엇을 선택하든 그건 또 그대로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