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 비평
『호텔 창문』- 은행나무 출판사, 2019.
수록작품 중
김사과,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
아름다운 동행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했습니다. 걸음이 빠른 토끼는 느림보 거북이를 앞섰습니다. 앞선 토끼는 거북이를 얕보고 도중에 풀밭에 누워 잠을 잤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지고 말았습니다. 거북이를 얕보고 잠을 잔 토끼도 나쁘지만 잠든 토끼 앞을 살그머니 지나가서 이긴 거북이도 나쁩니다. “토끼야 일어나! 깨워서 함께 가는 친구가 되자.” ‘ (신영복, 『처음처럼』 中)
토끼는 애초에 거북이를 이길 수 있었고, 거북이는 애초에 토끼를 이길 수 없었다. 그렇기에 토끼는 풀밭에 누워 잠을 잘 여유가 있었던 것이고, 조급한 거북이는 잠든 토끼를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거북이에게 나쁘다고 말하는 건 너무 억울하다. 거북이가 나쁘다고 말한다면, 경주의 모든 과정은 애초에 나쁘다. 누가 이길 지 뻔한 승부를 시작했다는 것은 승부가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승리가 예상되는 자의 강제이거나, 또 다른 누군가의 강제 속에 진행되는 연극이다. 토끼는 애초에 빠르게 태어났고, 거북이는 애초에 느리게 태어나서 둘은 주어진 연극 속에서 경주를 했을 뿐이다. 누가 이기는지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경주에서 잠든 토끼와 느린 거북이가 함께 결승선을 통과하길 바라는 것은 낭만적인 상상이다. 나보다 앞선 곳에서 반짝하고 빛이 나는 토끼의 옆에 서서 함께 결승선에 통과하고 싶다는 거북이의 낭만적 상상은 깨질 수밖에 없다.
김사과의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는 ‘이수영’의 낭만적인 상상을 차근차근 그려내고 있다. 김사과는 삶에서 느껴지는 토끼와 거북이의 속도 차이를 솔직하고도 비참한 언어로 표현해낸다. ‘이수영’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온 몸으로 감각할 수 있는 ‘한비’와 자신의 속도 차이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분노하고 있다. 김사과가 풀어 내고 있는 소설의 솔직한 언어 기저에 있는 분노는 생각보다 도드라진다.
'이수영의 주위에는 그녀의 부모를 포함해 자신처럼 적당한 불만족 속에서, 적당한 망상과 적당한 현실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한 채 살아가는 인간들로 가득했다. 한편 한비의 주위에는 그녀의 부모를 포함하여 그녀처럼 어딘가 황당한 꿈을 품고 둥둥 떠서 살아가는 비현실적 인간들로 가득했다.'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 2020 제65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127쪽)
‘이수영’과 ‘한비’가 완전히 대립되는 문장 속에서 ‘인간들’이라는 단어를 통해 대립에 대한 분노가 돋보인다. ‘인간들’이라는 말은 신이나 다른 동물과 반대되는 대상으로서 사람을 지칭할 때 또는 마음에 달갑지 않은 사람을 낮잡아 이를 때 쓴다. ‘이수영’과 ‘한비’의 주위 사람들을 ‘인간들’이라고 지칭한다는 것은 이미 마음에 달갑지 않은 어떤 것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마음에 달갑지 않은 어떤 것이란, 그저 적당한 선에서 자신에게 올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수영’의 삶에 대한 분노와 그와 정반대로 비현실적인 삶을 살면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는‘한비’의 삶에 대한 분노이다. ‘이수영’과 ‘한비’의 주변이 전혀 다른 게 우연적이라서 놀랍다는 듯한 말투이지만, 왜 하필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구심과 분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수영’은 ‘한비’를 열렬히 사랑한다. 그녀도 자신을 좋아하는 게 틀림없으며, 같이 몬트리올 여행을 갈 정도로 특별한 사이라고 생각하다. 그녀 옆에 서기 위해,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수영’은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런데 정작 ‘이수영’은 ‘한비’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자신이 그녀 옆에 서 있다는 낭만적인 상상은 역시나 실재가 아니었다.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었건만 이제야 한비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많았다. 도미니크가 문제의 몬트리올 친구였다는 것, 몇 년 전 몬트리올에서 한비가 그렇게나 이상하게 굴었던 것 역시 그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또한 놀라웠던 것은 그녀가 얼마 전 모교의 국문학과 대학원의 석사과정을 지원하여 합격했다는 것과 또 그녀의 신혼집이 옥수동 R아파트 단지에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충격의 하이라이트는 한비의 부모님이었다.’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 2020 제65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1쪽)
‘이수영’은 한 번도 ‘한비’와 동일 선상에 있던 적이 없다. ‘이수영’이 ‘한비’와 어울리기 위해 노력했던 자유로움과 물질의 충족은 ‘한비’에게 이미 갖춰져 있었다. ‘이수영’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시를 쓰며 돈을 벌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할 때 ‘한비’는 그저 하고 싶은 일들을 계속 했다. 준비 과정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한비’가 빛났던 이유는 토끼가 이미 빠른 발을 갖고 있는 것처럼, 그녀도 이미 모든 것의 기본이 되는 물질이 충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녀가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자유를 갖췄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그래, 맞아! 네가 한비의 예술가 친구!’
‘우리 한비는 보헤미안, 너는 예술가! 우리 한비는 보헤미안! 그리고 이수영이 너는 예술가! 예술가! 예술가!’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 2020 제65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144-145쪽)
오늘날 통용되는 보헤미안이란 말은 사회의 관습에 구에 받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형을 말한다. 예술가 역시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지만, 보헤미안과 예술가의 결은 조금 다르다. 특히, ‘한비’의 부모님이 ‘이수영’에게 건네는 보헤미안과 예술가라는 단어는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온몸으로 감각할 수 있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한비’와 ‘이수영’은 같지 않다. 친한 친구이지만 둘은 다르다고 ‘한비’의 부모님이 넌지시 말하고 있다. 보헤미안과 예술가는 둘 다 자유로울지 몰라도 ‘한비’의 보헤미안은 이미 다 갖춰진 상태에서 자유를 찾아 헤매는 여유이고, ‘이수영’의 예술가는 자유와 이상을 위해 경제적 현실에 고개 숙여야 하는 타협이다. 이상이라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다. 누군가의 이상은 누군가에겐 지극히 당연한 일상이고, 누군가 매일 마주하는 현실은 누군가가 열렬히 사랑하는 이상이다. ‘한비’의 일상은 ‘이수영’이 처음부터 꿈꿨던 결점 없는 유전자와 교양 있는 가정환경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결점 없는 유전자와 교양 있는 가정 환경 그리고 완벽한 사교육을 통해서 자신을 아이비리그에 보내지 못한 부모님의 한계, 즉 물질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 양쪽의 명백한 부족, 그리고 그 부족함을 아버지의 엄청난 야심이라든지 광기에 가까운 모성애 등으로 메꾸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그들이 너무나도, 뼈아프게 원망스러웠다.’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 2020 제65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120쪽)
‘한비’의 부모님은 딸의 방황과 자유로움을 ‘보헤미안’으로 바라보았고, ‘이수영’의 부모님은 딸의 낭만 가득한 시인 생활을 취직도 결혼도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라고 보았다. ‘한비’에게는 늘 그녀의 계획과 성취를 응원해주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그에 반해 ‘이수영’의 곁에는 그녀의 생일 파티에도 그녀를 혼자 두고 30분씩 늦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것도 ‘한비’와 어울리며 알게 된 친구들.
‘한비’와 그녀의 부모님에게 ‘이수영’은 그저 예술가 친구이다. 주인공 옆에 서 있다고 믿고 있던 ‘이수영’은 사실 그녀를 중심으로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수영’의 낭만은 산산조각 나고, 그녀의 어머니도 망연자실한다. 딸의 절망을 보며 어머니가 망연자실하는 것은 평범한 삶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머니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비’ 옆에서 함께 결승선을 넘어가려 했던 ‘이수영’의 낭만적 상상은 ‘한비’의 결혼식 이후 영영 사라졌고, 분노만이 남았다. 동시에 딸이 번듯한 직장을 다니며 좋은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는 어머니의 낭만적 상상 또한 붕괴하였고, 절망이 배가 되었다.
물질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낭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적인 이상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달려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뒤통수를 맞는다. 그리고 그 순간 꿈꾸던 낭만적 상상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삶이란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같다는 비유는 쓰라리다. 누가 토끼이고 누가 거북이인지 다들 속으론 알고 있다. 토끼가 잠들 일도 없고, 거북이가 이길 일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거북이가 행여나 이길 수 있으니 희망을 가지라는 말은 비참하기만 하다. 잠든 토끼를 깨워 함께 완주하라는 말도 낭만적인 상상에 불과하다. 결국 토끼는 아주 멀리 앞서 나갈 것이다.
김사과의 소설의 제목은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이다. 제목으로부터 시작된 소설은 ‘이수영’을 주인공으로 삼는 듯하지만, 사실 그 반대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재수 없는’ 주인공 ‘한비’와 그걸 뒤늦게 알아채고 분노하는 조연 ‘이수영’에 대한 내용이다. 김사과는 제목을 통해 주인공과 조연의 구분을 없애 버린다. 사라진 구분은 비참하면서도 낭만적이다. 자신의 삶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 아닐 수 있다고 해석한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비참하다. 반면, 주인공과 조연은 뒤집힐 수 있다고 해석한다면 이 소설의 제목은 낭만적이다. 김사과의 소설은 절망과 통곡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청년들에게 공감하고 있다. 그들의 현실의 비참함을 풀어내면서도 낭만을 놓지 않는 듯하다. 문학은 이런 데서 의미가 있다. 절망하는 누군가에게 공감하는 존재가 있음을 알려주고, 그 존재를 증명하는 역할을 문학이 하는 것이다. 신영복이 말한 것처럼 거북이에게 잠든 토끼를 깨워 함께 가라는 것은 매일 낭만을 깨뜨려야 하는 사람들에게 알맞지 않다. 이 말 자체가 낭만적이기 때문이다. 신영복처럼 ‘깨워서 함께 가는 친구가 되자’고 말하기보다는 김사과가 소설에서 말하듯이 거북이에게도 토끼에게도 공감하는 존재가 되어주겠다고 말하는 게 더 적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