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영실(靈室)

정령들이 사는 곳

by 이창근

우리나라 국도 가운데 해발 높이가 가장 높은 제주도 1100 도로가 폭설로 전면 통제되었다. 겨울 왕국의 문이 굳게 닫힌 것이었다. 영실로 올라 윗세오름 선작지왓에서 맞이할 붉은 해를 꿈꾸었던 마음은 허공에 흩어졌다. 저녁 밥상에 앉아 내일 아침 다시 확인해 보리라 다짐했다.


새벽녘, 제주경찰청 홈페이지는 여전히 붉은 글씨로 통제를 알리고 있었다. 덕분에 여유로웠던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시 한번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때였다. 흰 면 속에 푸른빛이 스며들었다. 도로가 열렸다는 소식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등산장비와 카메라를 차에 실었다.


1100 도로 통제는 해제되었지만 차량 운행은 영실매표소까지만 허락되었다. 들머리와 가장 가까운 영실통제소 주차장까지는 제설이 되지 않아, 영실매표소에서 통제소까지 2.4km, 40분 정도를 걸어야 했다. 어차피 걸으려고 산에 온 건데, 조금 더 걷는다고 뭐 대수랴. 영실에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으므로, 발걸음은 가벼웠다. 소복소복 눈까지 내리고 있어서 더욱 행복한 느낌이었다.


영실통제소를 지나 본격적인 등산로에 접어들자 호젓한 숲길이 나타났다. 눈 쌓인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이 마음을 안정시켰다. 뽀득뽀득 눈 밟은 소리가 숲의 정적을 깨뜨렸고, 간간히 뺨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은 집에 있는 아내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머언 곳의 여인의 옷 벗는 소리'처럼 흩날리던 눈발은, 김광균 님의 <설야>를 처음 읽고 가슴 설레었던 중학교 시절로 나를 데리고 갔다. 따뜻하고 반투명한 나의 입김이 부드럽지만 차가운 눈과 호응하는 걸 보면서, 병풍바위 직전까지 이어지는 겨울 숲을 천천히 걸었다.


병풍바위는 가파른 오르막 계단길을 올라야 했는데, 이때부터 모든 것이 돌변했다. 부드러웠던 바람은 매서운 송곳처럼 몸속을 파고들었고,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뒤덮였다. 거센 바람에 숨을 고르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을 때, 무거운 구름 사이로 빛이 내려서 마치 스폿조명을 비추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조명은 이내 꺼졌고, 진행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윗세오름 쪽으로도 시야가 멀리 뻗어나가지 못했다. 거센 맞바람 속에 휘청거리면서 계단길을 오르자 환상적인 구상나무 숲이 펼쳐졌다.


[왼쪽] 병풍바위 오름길에서 돌아본 풍경 [오른쪽] 병품바위 오름길 진행 방향
병풍바위 계단길을 오르면 펼쳐지는 환상적인 구상나무 숲


우리나라 고유종인 구상나무는 1920년대 미국 식물분류학자 윌슨에 의해 '아비에스 코레아나(Abies Koreana)'라 명명되어 외국에 소개되었고, '크리스마스트리'로 각광받으면서 90종 이상의 개량종이 개발되었다. 그런데, 한라산에서 구상나무의 분포가 기온상승과 태풍, 가뭄 등의 기상 현상으로 100년 전 대비 절반으로 줄었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안타까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구상나무 숲을 벗어나 작은 돌들이 서있는 밭이라는 의미의 선작지왓에 이르자, 바람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눈은 얼음 알갱이로 변해 내 눈두덩을 따갑게 때리기 시작했다. 고글을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시야는 더욱 갇혀 나아가지 못했고, 앞에서 다가오는 것이 사람인지 아닌지 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 순간 등반 중 짙은 안개나 눈보라를 만나면 방향 감각을 잃고 제자리를 맴돌다 끝내 지쳐서 더욱 위험한 순간을 맞닥뜨린다는 의미의 등산 용어인 '링반더룽(Ringwanderung)'이 떠올랐다. 지금은 등산로를 나타내는 가이드라인이 잘 설치되어 있어서 그럴 염려는 없지만, 예전에는 선작지왓 부근에서 그런 일이 종종 발생했다고 한다. 히말라야 8,000m 고봉을 오르내린 베테랑 산악인이었던 윗세오름 관리인조차 눈보라 치는 밤에 화장실에 갔다가 코앞에 있는 숙소를 찾지 못해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밤을 새웠다는 얘기가 빈말은 아니었겠다 싶었다. 여기는 정령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의 영실(靈室) 아닌가.

바람에 맞서느라 잔뜩 경직된 몸을 이끌고 겨우 발걸음을 옮겨 윗세오름 대피소에 다다랐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컵라면과 가지고 온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모두 편안해 보였고 생기가 돌았다. 누군가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하면서 가지고 온 방울토마토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그들로 인해 대피소는 훈훈했고, 왁자지껄함 속에서도 질서가 있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는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영실을 꼽았다. 5월 선작지왓에 붉은 털진달래가 만개한 것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다른 이들의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을 보니, 파란 하늘 아래 남벽분기점을 배경으로 찍은 설경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래서 더더욱 유홍준 교수의 말씀에 신뢰가 간다. 다만, 나는 아직 내 눈으로 직접 그런 풍경을 보지 못했다. 아직 영실(靈室)에 사는 정령들의 허락을 받지 못한 것이다. 다시 와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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