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씀’ 글감으로 쓰는 조각 글
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분다. 가을장마도 태풍도 지나갔다. 며칠 쏟아지던 비도 그쳤다. 구름이 걷히고 은은하게 밝은 달이 보인다. 가을 하늘은 높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달은 참 크고 가깝다. 달을 보고 있으니 만나고 싶은 얼굴들도 하나 둘 떠오른다. 창밖에는 아직 잠들지 못한 불빛들도 군데군데 밝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과 달빛, 귀뚜라미 소리, 그리고 촉촉한 비 냄새가 방으로 새어 들어온다. 여름 내내 울던 매미 소리가 처절하고도 뜨겁게 들렸다면, 귀뚜라미의 소리는 좀 더 노랫소리와 같다. 동글동글 물방울들이 빠르게 굴러가는 소리 같달까. 여유롭고 또 자유로운 베짱이의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늦은 밤 잠 못 이루고 밖을 거니는 이들에게 불러주듯 말이다. 너무 덥거나 추워서 잠 못 이루던 날들과는 달리, 가을밤에는 여러 감정이 몽글몽글 올라와 잠들기 어렵다. 괜히 이런저런 잡념들이 스친다.
자려고 누워 음악도 선풍기도 꺼진 집안은 자연의 소리만이 가득하다. 몇 시간 전만해도 아이들이 뛰어놀던 놀이터도 지금은 가을밤의 공간이다. 뽀송하게 마른 이불을 덮고 누워 살짝 이마를 간지럽히는 바람이 좋다. 부드러운 붓으로 칠하듯 섬세한 바람이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이 어느새 갔나보다. 여름의 태양처럼 뜨거웠던 날들이 지나면, 선선한 가을밤처럼 편안한 시간이 온다. 나는 이 적당한 온도와 편안함이 좋다. 가을은 존재감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은근하고 편안하게 지나간다.
누군가는 가을밤이 쓸쓸하다고 하더라. 그것은 누구보다 뜨거운 여름을 보냈기 때문에 더 허전한 것이겠지. 정열적인 감각들이 계절을 채우던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나는 이 은은함이 모여 편안함을 만들어내는 이 순간이 좋다.
짧아서 아쉬운, 그렇지만 기억하고 싶은 가을밤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