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우리 애가 스웨덴어를 더 배우고 싶어 하는데 과외를 받는게 도움이 될까요?” 아이 선생님의 눈에 놀라움이 묻어 나온다.
“과외요? 음... 집에 TV 없나요? TV만 틀면 스웨덴어가 나오는 데 무슨 과외를?.....”
“아...네...”
담임 선생님의 시선이 아이쪽으로 향하며
“집에서 TV 만화 보면 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아마 만화 보면서 공부하는게 더 행복할 걸?! ... 쐐기를 박고 고개를 양옆으로 설레설레 저으며 화제를 돌린다.
“엄마! 제발, 제발, 제발! 스웨덴 과외 선생님 좀 구해 주세요!” 라고 이야기 했던 아이의 입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선생님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아이가 원해서요!” 라는 이야기를 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포기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이런!.... 아이의 담임 선생님에게 공부에 절절매는 학부모로 찍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해 학부모 상담중에 있었던 일이다. 스웨덴에서는 1년에 두번 학기별로 학부모 상담이 진행된다. 그리고 이때에는 반드시 아이가 동행된다. 학부모 상담의 주인공은 학부모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닌, 함께 참여한 자녀이기 때문이다. 학부모와 담임 선생님 사이에 이견이 생길때도 해답은 아이로부터 나올 때가 많다. 그리고 상담중 가장 중요한 화제는 단연 <아이가 학교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가?> 에 대한 질문이다.
그 물음에 아이가 “Yes” 라는 대답을 한 이후에야 여타 다른 생각들이 교환이 된다.
스웨덴에서의 교육의 본질은 <아이의 행복>, 그리고 그 주체는 <아이>가 된다는 스웨덴 교육의 철저한 기본 원칙은 교육현장의 곳곳에서 쉽게 관찰되어 진다.
승부조차 가리지 않는 아이들의 스포츠 경기는 이기고 지는 결과가 아니라 게임을 즐기는 과정을 가르친다. 축구경기에 자살골을 넣어 게임의 흐름을 방해하는 어설픈 행동을 한 친구의 실수에도 박수를 보낼 수 있는 너그러움이 있는 스웨덴의 아이들이 놀라울 때가 있다.
<아이가 속한 어린이 여자축구팀>
지인의 어린 아들이 골프를 배운 적이 있었는데, 골프레슨을 시작한지 한참 동안 아이는 골프채 잡는 법이 아니라 골프채와 노는법을 익히게 된다고 하였다. 답답하리만큼 아이들에게 골프수업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지인이 한국방문후 아이에게 골프 레슨을 시켰는 데, 한국의 골프 선생님께서 한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 많은 아이들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골프수업을 지겨워 하는데, 아드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고 즐거워 하네요!”
<아. 요거구나!> 지인은 골프채와 함께 충분히 놀았던 시간을 통해 아이가 <집중과 즐거움>이라는 배움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배울 수 있었다라고 이야기하였다.
<그냥 즐기는거야!>
스웨덴 교육의 가장 큰 장점들이 아닐 까 싶다.
<아이의 행복, 배우는 과정의 즐거움, 기다려주는 여유로움> 등은 스웨덴 아이들의 자유롭고 행복한 얼굴 표정과 태도에서 쉽게 관찰되기도 한다.
하지만 <과정과 즐거움> 을 중시하는 스웨덴의 교육이 <성취와 결과>를 통해 더 큰 행복감을 느끼는 아이들에게는 과연 어떨까?
강한 성취욕과 지적인 호기심이 가득한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 학습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해 교육과정 자체를 지겨워 하는 경우도 생겨난다. 만 10살이 되어가는 딸아이도 가끔 이런 얘기를 할 때가 있다.
“오...늘...의 ... 공...부...내...용...은...........” 선생님의 말소리가 영화의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진다는 표현이다.
학습을 할 때 만큼은 집에서 혼자 공부할 때가 재미있다는 아이의 이야기는 아이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다양한 책들을 제공하는 것 이외에는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으로 결론을 맺게 된다. 모두를 만족 시킬 수 있는 교육환경을 기대한다는 건 욕심이다.
역시 교육에는 정답이 없다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보게 된다.
하나에서 열까지 내아이에게 맞는 교육을 찾는 것은 스웨덴이 아닌, 전 세계 어느곳에서도 불가능할 것이다. 아이의 행복을 중시하는 이 스웨덴의 교육환경에서 내 아이가 느끼는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어떻게 채워 줘야 할 것인지는 부모의 몫인 것 같다.
발명가의 아들이라는 스웨덴이 자랑하는 노벨상의 창시자 알프레드 노벨은 어린 시절 지적 호기심이 매우 왕성하여 당시 공학자였던 아버지 이마누엘로부터 공학의 기초를 배웠다고 한다. 러시아로 이주한 후에는 개인 가정교사를 두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 어를 완벽히 익혔을 뿐만 아니라 그의 나이 16세에 이미 사람들이 알아주는 이름있는 화학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러시아, 파리, 미국등에서 공부한 그가 만약 미래의 이 시간안에서 스웨덴 교육을 받는다면 어땠을 까?라는 혼자만의 상상을 해 본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 이 시절의 스웨덴 교육만으로 알프레드 노벨이라는 시대적 발명가가 다시 탄생될 수 있었을까? 학교에서 배우는 화학만으로 16세에 화학자의 명성을 얻고, 다이나 마이트를 발명해 낼 수 있었을까? 고개가 갸우뚱 거려지는 순간이다.
부모의 과열된 경쟁으로 뿌리박힌 교육, 비교와 상대적 평가로 찌든 아이들의 모습은 <불행>이다.
하지만 평등이 우선시되는 교육 안에서 채움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도전적인 환경에서 자극받기를 좋아하고 성취감을 느끼며 자신의 잠재력을 깨워 나가는 아이에게 완벽할 것만 같았던 스웨덴의 교육도 모자란 부분이 보인다.
살수록 어려운게 인생이라는 말처럼 아이가 커갈수록 부모의 역할에 무게감이 느껴진다.
내 아이가 다른 많은 아이들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 스웨덴의 교육철학안에서 우리 아이가 길을 잃지 않고 자라길 바래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