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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Sep 18. 2022

할머니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스스로 좀 컸다고 생각한 시점부터 내 영혼 일부는 할머니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느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뇌에 전구가 켜진 듯 딱 떠오른 생각이었다.


 이번 추석을 며칠 앞두고 할머니는 작은 고모와 장어구이를 먹고 온 그날 저녁, 진짜로 힘이 솟구친 건지 커다란 이불을 들고 가다가 방 안에서 넘어지셨다. 원인미상의 척추 2번 뼈 골절 진단서를 받고 할머니는 누워 계신 상태로 나를 맞이했다. 눈에 초점을 일부러 놓고 있는 건지 멍하게 앞쪽만 보고 있는 할머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었다. 본인이 베고 있는 베개 하나를 빼서 나를 주려고 하길래 손사래를 치며 말렸더니, 어디선가 할아버지가 세 배개를 꺼내와 내게 건넸다.


 할머니는 바다 해에 나눌 분자를 이름으로 쓴다고 했다.


"바다가 이렇게 파도가 거칠고 거세잖니. 그 바다를 나누고 있으니 인생이 편치 않다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폐병을 앓게 된 할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할머니는 꽤나 고된 인생을 살아왔다. 할머니는 내가 좀 컸다고 생각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서울에서부터 집안 어른들이 계신 경기도 광주까지 할머니의 엄마와 몇 시간을 걸어서,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정체불명의 약을 받으러 갔다는 일화였다. 묘지를 건너 개울도 건너 세월을 건너왔다는 것이었다.


"너 나이가 올해 몇이지?"

"여섯. 스물 여섯!"

 "응. 이제 출가해야겠네. 만나는 사람 없어?"


 할머니가 치매를 앓고 난 후 내 얼굴만 보면 묻는 레퍼토리였다. 하나뿐인 아들의 쌍둥이 딸 중 맏이로 태어난 나는 아들과 며느리가 힘들다는 핑계로 할머니 손에서 2년을 컸다. 할머니의 육아 방식이 어땠는지 알 길이 없지만 아빠는 그때를 떠올리면서 ‘어찌나 씩씩하던지 골목대장 행세를 하던 꼬마’라고 말하곤 했다.

 

 할머니 곁에는 늘 사람이 모였다.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뛰어나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떡볶이와 순대로 갖가지 음식 장사를 하면서 아픈 할아버지를 챙기고 자식 셋을 길렀다.


"내가 먹을 게 없어도 김장하면 아랫집 윗집 다 나눠주고 그렇게 살았어."


 나이가 든 할머니 집에는 이제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허리를 다친 할머니가 음식을 못하니 엄마와 고모들이 각자 해온 음식 몇가지로 단출한 추석상이 차려졌다.


"뭐해서 먹니?"

"음식 싸왔어요 어머니!"

"국은 있니?"

"네 해왔어요, 토란국!"

"샀어?"

"아뇨 어머니, 제가 했어요!"


 뭐 가지고 먹냐는 말은 음식 잘하는 할머니의 자존심이 섞인 말이었다. 요새 무엇을 줘도 다 싫다고 한다는 할아버지의 잔소리를 안주 삼아 할머니가 토란국 한 숟갈을 떴다.


"아이고 좀 드시네. 토란 좀 드셔. 부드러운 거."


 할머니가 식사하던 걸 지켜보다가 엄마가 나보고 휴지 몇 장을 뜯어오라고 했다. 엄마는 휴지로 아기보로 만들어 할머니 웃옷에 살짝 껴줬다. 할머니는 토란국 안에 무와 나박김치 속 무 몇 개를 건져 드셨다.


"아휴 허리 아파."


 할머니가 드시던 숟가락을 내려놨다. 부축해주려던 아빠가 일어나려는 소리에 ‘가만 있어 봐’ 가만있어’ 하며 스스로 숨을 고르셨다. 차분하게 평정심을 찾고 움직이고자 하셨다.

 

"밥 좀 더 먹어라."

"네 많이 먹었어요."


 할머니는 내가 제 나이답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말갛고 갸름한게 열여덟, 열아홉처럼 보인다고 했다. 일년에 겨우 두어번, 손주들 자라는 걸로 이어지던 추석날의 대화가 그들이 출가할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할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합쳐졌다. 다 늙은 할머니를 바라보는 아빠의 눈빛이 걱정이 되었다가 기쁨이 되었다가 시시각각 변했다.


 할머니는 나를 보면 실핏줄 하나 없이 눈에 눈물이 자주 고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할머니가 왜 우는지 알 것 같았다. 초등학교 때는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할머니 무릎에 앉아 울며 떼를 썼고 중고등학교 때는 애처럼 두어 번 소리 내 울었고 성인이 되니 겨우 눈물을 참을 줄 알게 되었다. 이번 추석에는 누워있는 할머니를 보고 내 눈물이 먼저 고였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보고 말없이 눈물을 고여내다가 몇 방울 흘렸다.


"할머니 저 갈게요. 밥, 밥 잘 드셔야 해요."

"손주 말 잘 들어."

할아버지의 당부였다.

"응…그래 고맙다. 할머니가 이번에 용돈도 못 주고…"

"용돈 이제 안 주셔도 돼요. 저 돈 벌어요."

"어디 댕기는 데 있어?"

“네.”

“너 나이가 몇이지 이제?”


똑같은 질문을 묻는 할머니에게 몇 번이고 똑같은 대답을 해드렸다.

돌아오는 차로를 따라 본 달은 유난히 선명하고 밝게 빛났고, 뻔하지만 소원을 빌었다.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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