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올 한 해 동안 내 삶이 어땠는지 다시 돌아볼 겸 휴대폰의 앨범을 뒤적거리며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정리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모두 사라져 버릴 것 같아, 2025년이 오기 전까지 올 한 해를 정리하는 글을 써보기로 했다. 별로 대단한 내용은 없을 거다. 그저 내가 무엇을 하며 올 한 해를 살아왔는지, 그에 대한 기록들을 뿐이다.
2023년 12월 크리스마스쯤 2년 만에 한국에 왔었다. 휴가로 찾은 한국이었는데, 원래 일주일 후에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려 했었지만, 원서를 냈던 한 대학교에서 임용에 서류가 붙었다며 와서 시험강의와 면접을 보라고 연락이 왔다. 급하게 휴가일을 연장하고 비행기를 늦춘다. 게다가, 3월 말에 프랑스의 계약이 끝나기에 원서를 넣었던 스페인의 한 연구실에서도 면접을 보자는 연락이 왔다. 그렇게 휴가로 즐기러 온 한국이었지만, 면접을 위해 전공책도 다시 펼치며 강의준비도 하고 면접 준비도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스페인 화상면접은 정말 말아먹고, 바로 다음날이 대학교 임용 시범강의&면접이고 그 후 바로 공항으로 가서 출국해야 했다. 시범강의는 나쁘지 않게 한 것 같은데, 면접에서 너무.. 가벼워 보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무사히 마쳤다는데 의의를 뒀고, 공항으로 바로 갔다. 면접 준비한다고 시간이 없어서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프랑스로 떠난다며 전화를 한다. 너무도 피곤해서 공항 약국에서 피로회복제를 잔뜩 사서는 먹고 정신을 차린다. 지긋지긋한 12시간의 비행 끝에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도착했고, 환승하여 스트라스부르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캐리어가 안 나온다. 내 캐리어가 분실되었다. 뭔가 한 해가 잘 안 풀리려 하나 하는 불길한 기분이 가득했다. 캐리어는 다행히 며칠 뒤에 배송되었다. (캐리어가 분실되면 이후 찾아서 주소지까지 배송해서 가져다주더라.)
한국에서 돌아온 지 1주일쯤 되었을 까, 임용 결과가 나왔다. 면접에서 탈락이었다. 최종 총장/이사장 면접의 기회는 없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렇구나 싶었다. 박사 지도교수님께 떨어졌다고 연락을 드렸다. 한국에 갔을 때도 교수님을 뵙고 인사를 했었는데, 그때 지금 있는 곳이 계약이 끝나면 그 후에 한국에 XXX 교수님 연구실을 가보면 어떻냐는 제안을 하셨었다. 그 교수님은 그 분야에서 나름 세계적 대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분이신데 지금 포닥을 찾고 있다고 하셨었다.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드리고 말았었는데, 임용에 떨어졌다 하니 다시 한번 그 교수님 얘기를 하셨다.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최근 면접을 보면서 서로 다른 곳들에서 받은 공통적 질문이 있었다. 그 질문을 생각한다면, 다음은 빠르게 결과를 낼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게 맞았다. 고민을 하다가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한국에 있는 XXX교수님 연구실을 갈 경우의 장점을 얘기했다. 사실 단점은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점 외에는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망설일 이유가 없기는 했다. 언니가 말했다. "안 갈 이유가 없지 않아?" 언니의 한 마디에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혼자 정한다는데 불안감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바로 지도교수님께 XXX교수님 연구실에 지원하겠다고 하고, 내 CV를 보내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XXX교수님으로부터 제안이 왔다. 그렇게 한국행이 빠르게 결정되었다.
내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었다고 말하자, 프랑스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는 다가오는 주말에 바로 자기 집에 초대를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시간 있을 때마다 함께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와 그의 와이프, 그리고 연구실 다른 동료 한 명까지 넷이 함께 했다. 언제나처럼 코스로 음식이 끊임없이 나왔고, 와인도 아주 넉넉했다. 이제는 익숙하게 런치를 먹으러 갔지만,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즐거운 만남이 이제 몇 차례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들었었다.
토요일마다 봉사하는 한글학교에도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알렸다. 한글학교에서는 유아반 보조교사로 일하고 있었기에 보통은 별로 할 일이 없었지만, 메인교사 분이 한국에 잠시 들어가셔서, 2주간 홀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이들과 함께할 활동을 준비해서 토요일마다 2시간씩 애들을 가르쳤다. 아이들과 함께할수록 내가 아이들을 꽤 좋아한다는 걸 느낀다. 자그마한 손으로 꼼지락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자면 귀여워서 언제나 쓰담쓰담을 해주고 싶어 진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쿠킹클래스가 있었다. 1월은 김치였다. 김치 담그기를 하기 위해 준비하고 홍보를 했다.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신청했다. 배추를 한 포기씩만 하려 해도 절여두기가 버거워 맛김치형태로 잘라서 준비하기로 했다. 취향에 따라 배추 or 무 (아니면 둘 다)를 선택하여 신청하도록 안내했다. 사람 인원에 맞게 재료들을 준비했다. 그 후에는 갓 담근 김치에 돼지고기 수육과 칼국수까지 준비해서 맛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렇게 준비한 당일, 레시피대로 요리를 알려주는데, 예상치 못한 점이 새우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들이 새우젓을 못 먹는다는 점이었다. 프랑스에 있으면서 종교, 취향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음식에 제한적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다양성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없었는데, 프랑스에 있으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김치 아뜰리에를 하며 재밌었던 점은, 먼저 레시피대로 양념을 만들게 한다. 그런 후, 양념 맛을 보고 맛이 괜찮으면 배추 또는 무에 버무리게 하는데- 버무리기 전 내게 최정 확인을 받게 했다. 내가 맛있냐고 물으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양념이 맛있다고 말한다. 내가 맛을 보면, 제대로 된 양념이 단 하나도 없었다. 내가 다시 양념을 이렇게 저렇게 추가하며 수정해 준 후, 다시 맛을 보라고 하면 다들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게 진짜 맛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외국인들이기에 김치에 대한 맛의 기준점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았다. 이렇게 쿠킹 클래스를 마치고, 며칠 뒤에 인증사진으로 김치가 잘 익었다며 너무 맛있다는 메시지들을 보내왔다. 뿌듯함을 느꼈다.
또 다른 문화 아뜰리에로 보자기 아뜰리에를 진행했다. 한국에 다녀오며 쿠팡으로 보자기를 몇 가지 사 왔다. 그런 보자기로 유튜브를 보며 쉽고 예쁜 매듭들을 배우고, 클래스를 진해했다. 보자기는 꽤나 힙한 재료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eco-freindly 하고, 동양적으로 독특함도 있고,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아이템이다. 보자기 아뜰리에는 생각보다 신청자는 적었지만 참가자들은 아주 만족해했다. 자신들이 만드는 하나하나 모든 것들을 사진으로 남기며 너무 예쁘다고 즐거워했다. 수강생 중 한 명은, 몇 달 뒤 부활절에 가족들을 위한 생일을 보자기 포장법으로 포장한 것을 내게 인증사진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3월에 근교 도시에서 "한국의 날"행사가 있는데 그때 사물놀이 공연을 하게 되었다. 돈도 받는다. 원정 공연이었다! 공연을 위해 사물놀이를 매주 모여 연습하기 시작했다. 엉망진창이던 소리는 한 번, 두 번 호흡을 맞추며 소리가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다. 징으로 시작했던 나는 장구가 되었다. 내가 뭘 해도 사람들은 내게 재능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평소처럼 그림을 그리고 요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크릴화를 여전히 20 cmX20 cm 캔버스에 그렸고, 제법 괜찮은 듯한 그림을 그렸지만,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한 후 그림들을 처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족발을 만들었다. 간장에 향신료를 넣고 졸이면 그만이라 너무 쉬웠지만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했다.
감자탕을 만들어서 한국인 지인들과 오래간만에 술자리를 가졌다. 소맥도 마시고, 감자탕에 떡볶이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좋은 사람들, 좋은 음악, 좋은 음식과 술이 곁들여지면 좋은 하루가 완성된다.
한국 커뮤니티에서 반찬 배달을 원하는 사람이 있어 연락이 닿았다. 40유로로 원하는 반찬을 만들어 전달했다. 딱히 멀리 갈 것도 없이 중간지점에서 만나 돈을 받고 반찬을 건넸다. 서비스로 준 감자탕을 너무 좋아하며 그다음 메뉴로 주문이 또 들어왔다. 딱히 돈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즐거움을 위한 건데, 돈까지 벌다니...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