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D
오랜만이었다. 정말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세어보지 않았지만, 마주한 순간 모든 게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우리가 다시 마주하게 될 날이 올지조차 확신하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오늘, 불현듯 우연히 마주하게 된 이 순간이 참 이상했다. 그동안 나누고 싶었던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막상 눈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을 보니 말문이 쉽게 트이지 않았다.
사람이 변했을 거라 생각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으니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주하고 보니 여전히 그대로였다. 웃는 모습도, 장난스럽게 말을 던지는 태도도 전혀 변한 게 없었다. 마치 우리가 그때 잠깐 떨어져 있었던 것처럼, 어색함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는데도 말이다.
잠시의 침묵 속에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었다. 사실, 그 질문은 만나기 전부터 마음속에 준비해 두었던 말이었다. 오랫동안 궁금했다. 잘 지내고 있는지, 혹시 힘든 일은 없었는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머릿속에 수없이 그려보던 모습이 눈앞에 실제로 나타났으니 그 질문들이 쏟아져 나와야 했는데, 참 이상하게도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려서일까? 아니면 말하지 않아도 무언가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그 사람은 그대로였지만, 나의 마음속에도 변하지 않은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동안 바쁜 일상 속에 파묻혀 살아왔다. 숨 쉴 틈 없이 흘러가는 시간들 속에서 애써 그 사람을 잊으려 했고, 한때는 정말로 잊은 줄 알았다. 하지만 가끔 불현듯 떠오르던 그 기억들, 문득 생각나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만들었던 그 사람. 오늘 이렇게 다시 마주하고 보니, 그동안의 시간들이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간 것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무심코 쌓여온 기억들이 새롭게 피어오르며, 그때의 감정들이 다시금 내 마음을 두드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면서도 왜 그토록 많은 다툼들이 기억나지 않는 걸까? 참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수없이 많은 싸움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마음이 상한 적도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게 되니, 그때의 서운함이나 아픔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속에 숨겨져 있던 행복했던 순간들, 함께 웃고 떠들었던 시간들만이 내 마음속에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사람이란 참 이기적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기고, 잊고 싶은 것들은 어느새 다 사라지게 만들어버리니까.
잠시의 대화 속에서, 나는 그 사람의 표정을 관찰했다. 여전히 익숙한 미소, 장난스러운 눈빛.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미소를 보며 내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미소 속에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마치 그 시간 동안도 우리는 서로를 잊지 않았다는 작은 증거처럼. 그리고 그 미소가 내게 전하는 메시지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물론 오늘 이 만남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될지, 아니면 그저 우연히 마주친 하나의 사건으로 끝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 사람과의 재회가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작은 감정들을 다시금 일깨웠다는 것. 서로가 지나온 시간들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 마주한 이 순간,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여전히 그때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 지냈나요? “라는 그 한마디였다. 사실 그 질문 속에는 너무나도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서로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이 그 한마디 속에 다 들어가 있었다.
결국,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르지 않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이지만, 그동안의 시간은 마치 아무런 의미 없이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게 어제 일 같은데,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