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d.ear)
그날도 나는 도화지를 펼쳤다. 아무 말 없이 책상 위에 얹어둔 하얀 종이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쥔 연필의 감촉이 익숙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너를 바라봤다. 거기 앉아있는 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그렇듯, 네가 앉아있으면 세상은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뭐 하고 있어?” 너는 가만히 묻는다.
“너 그리려고.” 나는 웃었다.
너는 한 손으로 머리를 만지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럴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참 이상하게도, 네 얼굴은 내가 늘 그리던 그림과는 달랐다. 간단하게 몇 번의 선으로 묘사할 수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사람의 얼굴이란 대개 그리 복잡하지 않은데, 너를 그리고 있으면 그 모든 단순한 선들이 복잡하게 얽혔다. 네 눈, 그 작은 귀, 그리고 그때마다 붉어지던 볼까지. 나는 그 모든 디테일을 놓칠 수 없었다.
“갈색눈, 갈색머리…” 나는 네 얼굴을 보며 속삭이듯 말한다.
“왜 중얼거려?” 너는 가끔 내가 하는 이 조용한 혼잣말에 놀라곤 했다.
“그냥, 네가 어떤 모습인지 기억하려고.”
네 눈은 맑고 부드러웠다. 갈색 머리카락은 햇빛을 받으면 금빛으로 변했고, 그 짧은 순간의 색감은 언제나 내 눈에 박혔다. 그 모습 그대로를 도화지 위에 옮기고 싶었다. 하지만, 연필로 그리는 것만으로는 그 순간의 빛과 그 따뜻한 느낌을 전부 담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종이 위로 선이 하나둘 그려질 때마다, 나는 그 너머의 너를 생각했다.
“너, 가끔 그림 그릴 때 너무 진지해져.” 네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진지해야지. 네 얼굴이잖아.”
너는 다시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입가엔 미소가 남아 있었다.
너를 그리면서, 네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더 선명해졌다. 네가 뚱한 표정을 지을 때조차도 나는 그 안에서 너의 따뜻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표정조차도 나에게는 사랑스러웠다. 네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볼 때, 그 눈빛에서 느껴지는 조용한 안심. 그런 작은 순간들이 내가 네 얼굴을 손끝으로 그려내게 만들었다.
연필은 가끔 서툴게 종이를 긁었다. 나는 네 얼굴을 완벽히 담아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종이 위에 그리는 것은 네가 가진 겉모습에 불과했지만, 내가 진짜 그리려던 건 그 너머의 너였다.
“왜 나를 그리고 싶어?”
네가 불쑥 물었을 때, 나는 잠시 멈췄다. 연필 끝을 종이 위에서 띄운 채, 나는 너를 바라보았다.
“글쎄… 아마도 사진으로 남기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네 모습을 기억하고 싶어서.”
네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이 충분한 대답이 되었을지 잘 모르겠다.
나는 네 얼굴을 그리면서, 그때 그 순간의 너를 기억하고 싶었다. 사진은 빠르게 찍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순간적이다. 반면, 연필로 네 얼굴을 따라가는 이 시간은, 나에게 너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작은 선 하나, 그 안에 담긴 모든 감정들. 너를 향한 내 마음을 그 선 위에 남기고 있었다.
“넌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뭐?” 네가 물었다.
“그냥, 널 그리고 있으면… 네가 어디에도 떠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 말은 네게 어떻게 들렸을까. 너는 가만히 앉아 내 손끝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끔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고, 때로는 내가 그린 선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나는 네가 내게 미소를 지을 때마다, 그 미소를 어떻게 하면 더 잘 그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높은 코… 붉은 볼.” 나는 다시 혼잣말을 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너는 다시 묻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내 연필은 마지막 선을 그리고 있었다.
네 모습이 종이 위에 완성되었을 때, 나는 다시 너를 바라봤다. 너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잘 그렸어?” 네가 물었다.
“응, 그럴 거야. 하지만 네 모습 전체를 담지는 못했어.”
내가 그린 건 단지 외형에 불과했다. 네가 웃을 때, 네가 화를 낼 때, 네가 조용히 나를 바라볼 때, 그 모든 순간들을 연필로 담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괜찮았다. 나는 그 모든 순간을 내 안에 그리고 있었으니까.
“이제 뭐 할 거야?” 너는 조용히 물었다.
“음… 그만 그릴래.” 나는 연필을 내려놓고 도화지를 접었다.
“왜?”
“너를 더 그리고 싶지만, 이젠 기억 속에 두고 싶어서.”
내가 널 바라보는 순간은 도화지보다 오래 남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