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새벽까지 깨어 있을 때가 많다. 대낮의 열기가 식은 후라 서늘해서 좋고 적요 속에 듣는 김동률의 저음이 도드라지게 들리는 것 또한 좋다. 내가 좋아하는 시간 속에 우두커니 앉아있다 보면 내가 좋아지기도 한다. 오래 삶은 빨래처럼 색이 바랜 몇몇에 대한 아련함이 겹쳐지는 때도 새벽이다. 최근엔 새벽에 3통의 메일을 보냈다. 그 중 한통의 메일은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머나먼 나라로 보냈다. 말을 시작할 때 음..이라고 생각에 잠시 잠기는 듯한 말투를 지닌 아주 오랜 친구다. 말 수 적은 친구여서인지 답장은 짧거나 드문드문 보내온다.
새벽에 '아버지 전상서'라는 레트로한 제목으로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다가 말았다. 아버지는 평생을 드러내놓고 자식을 예뻐하지 않으셨다. 그런 나는 아버지가 여전히 어렵고 서먹서먹하다.
아침에 깨자마자 지난 새벽 내가 부려놓은 말의 흔적을 찾았다. 내가 부려 놓은 말들은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새벽에 부려놓은 말들이 제발 돌아왔으면 좋겠다.나의 바람대로 새벽의 말들은 돌아오지 않을테지만,어쩔 수 없는 것들은 어쩔 수 없는 대로 살아지겠지만 오늘 아침은 유난히 혀가 떫고 쓰다.
나만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