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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실 May 13. 2024

세 번째 만남

나폴레옹의 운명적 인연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흑백 TV 속에서였다. 그날 그도 나처럼 감기에 걸려있었다. 나는 허구한 날 감기를 달고 사는 어린이였다. 시내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약을 타 먹어도 감기는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나흘씩 감기와 싸우다 보면 눈은 움푹 들어가고 입술은 해져 입 가장자리에 상처를 남기기 일쑤였다. 억지로라도 먹어야 한다며 뜨끈한 국물에 만 밥을 쟁반에 받쳐 들고 엄마가 내 곁으로 왔다. 엄마가 듬뿍 뜬 밥숟가락에 갓 구운 간고등어 살을 발라 올려주고는 꿀꺽 삼키라고 할 때, 서양 군인이었던 그는 TV 속에서 콧물을 훌쩍 들이마셨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씩씩한 군인 아저씨도 감기에 걸린다니 속으로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그 군인이 먹는 물약이 내 약보다 효과가 더 좋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잠깐 스쳐 지나갔다.

엄마가 떠 넣어주는 밥을 간신히 삼키면서도 ‘에이치’ 하며 재채기를 하던 콧물감기 걸린 군인의 모습에 내 눈동자가 머물렀던 때였다.     

그 후로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건강해져서 감기를 달고 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언젠가부터 그 감기약 광고가 시야에서 멀어지더니 서양 군인도 함께 잊혀갔다. 나의 중학생 시절에는 유명한 참고서가 두 종류 있었다.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은 참고서를 애용했는데 하나는 『필승』이라는 것이었고 하나는 『완전정복』이라는 것이었다. 엄마에게 『완전정복』을 사달라고 했다. 건강해진 딸이 공부까지 하겠다니 기특하다 싶었는지 엄마는 단박에 사다 바쳤다. 내가 그를 두 번째로 만난 건 바로 그때였다.

참고서 『완전정복』의 겉표지 바탕은 파란색이었고 백마를 타고 붉은 망토를 걸친 용맹스러운 남자가 모델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 아래에는 흰 눈이 덮인 높은 산이 뾰족하게 그려져 있었다. 책 제목과 겉표지의 코발트색이 내 맘에 들었고, 모두가 어려워하는 영어와 수학도 이 책 하나면 완전 정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꽤나 들었다. 표지모델 남자는 무언가를 정복하려는 듯, 아니 나만 따라오면 그깟 공부는 문제없다는 듯, 앞발을 높이 치켜든 말 위에 앉아서 레이저 눈빛을 쏴대고 있었다. 그 덕분이었는지 나도 공부 좀 한다는 애들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특별히 그리워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내겐 없었다. 콧물감기에 잘 걸리지 않았을뿐더러 걸렸다 하더라도 그가 팔았던 감기약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중학 시절 참고서를 펼칠 일도 전혀 없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훌쩍 지나 유난히 눈이 잦았던 이번 겨울 끝자락에, ‘운명처럼’이라고 말한다면 거창하겠지만, 어쩌다 그를 만났다. 

나는 가끔 임헌영 교수의 인문학 강의를 유튜브로 보곤 한다. 강의는 언제나 좋았지만 잘 모르는 부분이 나오면 솔직히 재미없어지기도 했다. 교수님은 “이제 딱, 알겠죠?”라고 묻기를 좋아하시는데 재미가 없거나 잘 모르는 부분이 나오면 ‘딱, 모르겠는데요.’라며 마음속으로 혼자서 장난을 치고는 했다. 

그날 밤에는 러시아 문학에 대한 강의 중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편을 보고 있었다. 무슨 조홧속인지 그날은 교수님 목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이 소설이 최고인 이유는 전쟁만을 소재로 삼지 않아서이다. 성장소설적 요소, 교육, 연애, 육아 등 작품 안에 인간 세상사 모든 것이 들어있다며 교수님은 열강을 이어나갔다. 특히 재미난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러시아 보로디노 전투 장면이었다. 이미 영국과 스페인을 제외한 전 유럽을 석권한 그는 전략의 신이었다. 그랬던 그가 전쟁에서 패했다. 당시 그 지역에는 보로디노 전투가 있기 이틀 전에 많은 비가 내렸다. 그때 그는 방수 부츠를 신지 않고 나갔는데 그 바람에 군화에 물이 차서 하체가 전부 젖어버렸다. 부관의 작은 실수로 그는 코감기에 된통 걸리게 된 것이다. 감기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진 그. 판단력마저 흐려져 수많은 아군이 죽어나가는데도 적절한 전략을 낼 수 없었다. 어떤 러시아 역사학자는 그의 부관이 러시아를 살렸다고 말하기도 했단다. 이 부분에서 무언가 ‘짜르르’ 하는 신호가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흑백 TV 속에서 코감기에 걸려 훌쩍이던 서양 군인 장면을 오려내 머릿속 책상 위 왼쪽에 놓았다. 『완전정복』 참고서에 대한 기억의 줄을 당겨 오른쪽에 붙여놓았다. 보로디노 전투 당시 코감기에 걸려서 멍해졌다던 그의 얼굴을 끄집어 그 아래에 붙였다. 머릿속 필라멘트에 빨간 불이 ‘번쩍’ 들어왔다. 이제야 나는 딱, 알게 되었다. 내가 오래전에 알았던 그는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콧물감기에 걸린 나폴레옹을 감기약 모델로 설정한 CF 감독과 알프스산맥을 발아래 놓고 자신만만해하는 그를 표지모델로 선택한 『완전정복』 제작자를 향해 손뼉을 쳤다. 야밤에 미친 듯이. 그리고 한편으로는 헛웃음이 나왔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며 당장이라도 전 세계를 말발굽 아래 넣을 듯 호언장담하지 않았던가. 만약 영어, 수학을 정복하지 못했던 친구들이 하찮은 코감기 때문에 그가 전쟁에서 진 사실을 진즉 알았더라면 죽었던 기가 살아나 의기양양해졌을 것이다.

얼굴이 달아올라 창문을 열어젖혔다. 차디찬 밤공기가 시원하게 뺨에 닿았다. 하늘에는 희뿌연 무리를 옆구리에 채운 정월대보름 달이 뽀얀 미소를 날리며 떠올라 있었다.     

피천득 선생은 그의 수필 「인연」에서 아사코와의 세 번째 만남을 두고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나폴레옹과의 세 번째 만남에 대해 ‘아니 만났으면 어쩔 뻔’이라고 일기장에 진하게 적어 놓았다.

살아가는 동안 나는 이 겨울 끝자락에서의 만남을 아마도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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