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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실 May 21. 2024

어설픈 예술인

일상과 예술의 만남

옅은 능소화 색으로 바다를 물들여놓고 해는 떨어졌다. 점점 짙어지는 어둠은 해를 삼킨 것도 모자라 바다마저 삼킬 모양이다. 저녁을 지나서 밤으로 가는 시간. 바다가 만들어 놓은 구불구불한 길을 차박차박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옆구리에 플라스틱 양동이를 끼고 장화를 신은 중년 여인이 갯벌을 향해 걸어간다. 양동이에 담기는 것이야 많으면 팔고 그렇잖으면 된장이나 지지지 하는 마음을 먹어서일까. 여인의 뒷모습에는 쓸쓸함도 고단함도 묻어있지 않다. 이제 멀찌감치 물살을 밀어놓은 바다는 더욱더 짙어진 어둠도, 스러져 간 하루해도, 걸어가는 여인도 제 차지라는 양 모두를 끌어안고서 그저 잔잔할 뿐이다.


이것은 어설픈 예술인이 찍은 사진이다. ‘어설픈 예술인’은 커피숍을 운영하며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그녀의 닉네임이다. 커피숍 이름이 ‘여주다방’이라 본인 스스로 마담이라고 칭한다. 내가 어설픈 이를 만난 건 몇 해 전 카카오 뮤직에서다. 카카오 뮤직은 음악을 들으며 생각이나 느낌을 공유하는 SNS의 한 종류다. 음악에 얽힌 사연이나 추억을 적을 수도 있고 사진도 곁들여 올릴 수 있다. 음악을 공유하면서 만난 어설픈 이에게 내가 정작 끌렸던 이유는 음악이 아니라 사진 때문이다. 나는 맛있어 보이는 요리나 꽃 같은 정형화된 예쁜 사진을 주로 올린다. 그러나 그녀가 올리는 사진은 내가 올리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마담의 사진 속 주인공은 주로 이런 것이었다. 

윗니가 옴쏙 빠진 채로 굵게 주름이 패인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담고 있는 노파. 흐드러진  벚꽃나무 그늘에서 한가로이 나물을 다듬고 있는 여인. 보석 같은 별들이 총총한 밤하늘 아래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텐트 속 아이와 엄마. 빨랫줄이 축 처져 늘어지도록 널린 식구들의 옷가지들…. 

그날 올라온 사진도 그런 것 중 하나였다.  

그녀는 그 사진 위에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한 무리의 사진사들이 굶고 헐벗은 듯한 여자를 바위에 올려놓고 요란하게 셔터질을 할 때였어. 빛이 사그라지는 시간에 바케츠를 옆구리에 끼고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여인이 내 앵글 속으로 들어왔지. 더 어두워지기 전에 수확해야 한다는 일상의 반복이었을까. 에스 자 길에서 여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마담 이마의 머리카락들이 꼬여버리도록 카메라를 들고 있었던 기억. 옆에서 사진을 찍던 카메라맨들이 “저희 모델 찍으셔도 됩니다.”라고 말했지만 “아이구, 감사합니다만 메모리가 다 찼습니다.”라며 돌아섰지. 막 쪄낸 포슬포슬한 햇감자를 먹는 것처럼 흐뭇했던 그때.’ 

사진 동호회 사람들이 그녀에게 묻더란다.  

“그런 걸 뭐 하러 찍어?”    

어설픈 이의 답은 간단했다.   

“글쎄, 그런 거에 자꾸 끌리네.” 그녀의 대답 안에 나는 이 말을 추가하고 싶다.    


삶이라는 건 어제 주워온 조개 몇 알을 넣고 된장찌개를 담뿍 끓여 식구들 밥상 위에 올려놓는 그런 것은 아닐까. 인생이란 바다의 소금과 등허리 땀에서 나는 짠 내의 조화로운 합체는 아닐까. 산다는 건 어쩌면 마담이 찍는 사진처럼 별스럽지 않은 ‘그런 거’의 연속이지 않을까. 


그녀의 작품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거친 잡곡밥을 꼭꼭 씹어 먹었을 때 알았던 맛이 생각난다. 호로록 혀끝에서 느끼는 바닐라라테의 맛과는 다른, 쥐어도 보고 놓쳐도 본 중년을 넘겨야만 알게 되는 진득한 단맛이 배어난다.  

아침이면 안경 낀 암팡진 얼굴로 까망 물(우리는 커피를 이렇게 부른다)을 내리는 단단한 체구의, 오십 중반을 달려가는 전혀 어설프지 않은 마담에게 내가 끌리는 이유는 바로 ‘그런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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