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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실 Oct 24. 2024

다음 사람을 위하여

꿈 이루기

   나보다 네댓 살 더 먹은 언니뻘 되는 지인에게 촉촉한 목소리로 책 속 이야기를 들려주던 중이었다. 여행객들의 여유와 멋스러움에 부러움까지 섞어서.

 몇 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어디를 가서 유명한 무엇을 사 왔고 어디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식의 거드름을 피우는 이야기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낯선 곳에서 느낄 수 있는 신비감과 두려움도 있었지만, 피부색만 다를 뿐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분주한 듯 단정하게 녹아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처럼 살다가 온정을 느끼고 돌아온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작가와 함께 내가 외딴 마을에서 살다 나온 듯한 착각이 들며 설레기까지 했다.

  이병률 작가의 여행 산문집 『끌림』을 아껴가며 다시 읽었다. 책 중간쯤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작가는 베니스라는 도시에 중독되어 몇 번을 갔고 또 갔다. 그래서 한 번은 아예 한 달가량 머무를 생각으로 호텔이 아닌 집을 빌렸다. 그 집에 도착해서 어두운 방에 불을 켜고 방 안을 둘러볼 때였다. 탁자 위에 정성스럽게 포장된 선물 상자와 메모가 놓여 있었다. 메모지에는 ‘다음 사람을 위하여’라고 적혀있었다. 작가는 순간적으로 집을 잘못 찾아왔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매일 카페에서 모닝커피를 마시며 조간신문을 보는 주인으로부터 이런 사연을 듣는다. 수년 전부터 여행객들에게 집을 빌려주었는데 언젠가부터 여기에 묵은 사람은 다음 사람을 위하여 저마다 선물 하나와 이런 편지를 써 놓고 떠났다는 것이다.
 

 몇 달 동안 머문 이 집에서 나는 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여기, 굉장한 베니스에서 말입니다. 이곳에서 당신도 나처럼 멋진 경험을 하고 떠나시길! -이병률 산문집, 『끌림』 중에서
 
  두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 안은 지인은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에 찻잔의 온기 같은 흐뭇함이 희미하게 번지고 무언지 모르는 반짝임이 여인의 눈 속에서 너울댔다. 그러기를 잠시, 꿈을 꾸다 깨어난 사람처럼 “셋방도 셋방 나름이지.”라는 말을 서두로 서사를 풀어냈다. 큰 애를 거기서 낳았다고 하니 거의 40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다. 지금은 아침 햇살이 환하게 드는 베란다에서 우아하게 모닝커피를 마시는 마나님이 되었지만, 그때는 방 한 칸 부엌 한 칸, 마당 한가운데 공동 수도가 있던 다가구 셋방살이였다. 연탄아궁이 위에 얹힌 양은솥단지에 뜨거운 물만 있어도 근심 걱정이 없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여자들이 빨랫거리를 들고 수돗가로 모였다. 아낙네들은 그 집에서 구물거리는 가난을 벗고 나비가 되어 나풀나풀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그때는 다음 사람을 돌아볼 여유까지는 없었다. 살림이래야 양은 냄비나 빨래판 정도로 변변한 물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복을 비는 풍습이라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말하길, 이사를 나갈 때는 뭐라도 하나 놓고 가는 거라고 일러주었다. 지금이야 이사를 하면 인테리어 전문가나 포장이사 업체가 먼저 들이닥쳐 말끔히 정리하는 세상이니 행여 전 주인이 놓고 간 선물이 다음 사람에게 온전히 전해지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

“나는 방 한가운데에 빨랫비누 한 장을 놓고 나왔어.” 아마도 지인의 셋방에 입주한 누군가는 사는 내내 비누 거품처럼 부푸는 꿈을 꾸고 마침내 그 희망을 이루지 않았을까.
 
   『끌림』 속의 여행객들이 놓고 간 선물은 포도주나 손수건 혹은 자신이 읽던 책 같은 것이었다. 작가는 그 방을 떠나오면서 다른 여행객이 본인처럼 굶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파스타 한 묶음을 놓고 나왔다. 그리고 잊지 않고 메모지에 ‘다음 사람을 위하여’라고 적었다.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 들고 나는 공간이 있다. 월세방, 게스트하우스…. 여기에서 지내며 내게 필요했던 물건이었으니 어쩌면 다음 사람에게도 필요할지 모른다. 여행만 하면 발가락에 물집을 달고 다니는 내가 만약 이런 여행을 하게 된다면 일회용 밴드를 놓고 올 참이다. 혹시 모를 나 같은 다음 여행객을 위하여 말이다.

 평소 말쑥한 생김새와 세련된 옷차림이 나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던 지인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커피는 식어갔지만, 그 언니와 나 사이에는 전에 없던 줄 하나가 잇닿는 것 같았다. 알싸한 초겨울 아침에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봄날만 같았다.     

      

-《한국산문》 2024년 10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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