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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잘 왔다

우리의 뇌

by 박은실

여기까지 잘 왔다


뭍에 간을 빼놓고 용궁으로 붙잡혀 간 토끼라도 되는 것일까. 손안에 저 물건이 없으면 허전함을 넘어 불안하기까지 하다. 휴대전화야말로 현생 인류의 간 아니 뇌쯤 되는 건 아닐까. 어쩌다 내 휴대전화와 남편 전화기가 붙어있기라도 하면 나는 얼른 그것들을 떨어뜨려 놓는다. 그런 이유는 방전된 자동차 배터리 점프시키듯 혹여 내 전화기 속 정보가 남편 기기로 넘어가면 어쩌나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에서다. 남편이 몰라야 할만한 큰 비밀이 있는 건 아니다. 가끔 번뜩이며 글감이나 문장이 스쳐 지날 때 또는 그날의 감정 등을 나는 휴대폰 메모장에 적바림한다. 중요사이트 비밀번호를 적어둔 곳도 그곳이다. 그러하기에 나에게 휴대전화기는 전화기 이상의 개념으로 남들에게 쉬이 내보이고 싶지 않은 비밀문서와 다름없다.
요즘은 머릿속이 멍해지거나 하얘지는 증상을 자주 느껴 중요한 일을 놓칠까 염려가 된다. 냉장고 문을 열고 왜 열었는지 몰라서 그 앞을 서성이기 일쑤다. 또 글 한 줄 쓰려해도 적당한 단어가 생각이 나질 않아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며 거실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어떨 땐 약속을 잊을까 걱정되어 휴대전화를 열어 일정을 다시금 챙기곤 한다. 나만 그러는 것은 아니라고, 이러면서 나이를 먹는 거라고 위로해보지만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킨 날은 누에고치 실 풀 듯 정글같이 얽힌 뇌신경 줄 한 올을 잡아당겨 한쪽 귀로 빼서 버린 후, 반대쪽 귀 안으로 새 신경 줄을 넣는 말도 되지 않는 기술을 상상한다. 정말로 그렇게만 된다면 오래된 컴퓨터 포맷하듯, 정리된 뇌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혼자 피식 웃어도 본다. 그러다 또 어떨 때는 현대 최첨단 의술로 뇌 이식 같은 건 어려울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식이 성공한다면 새로운 뇌에 나를 어떻게 입력해야 하냐는 문제에 봉착하고는 모자란 머리를 뒤흔들어 결론 없는 상상을 마무리하기도 한다.
뇌 과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의 뇌는 1.4~1.5kg짜리 고깃덩어리로 두개골 안에 갇혀 지내는 수인 신세라고 한다. 실제 뇌는 생각보다 별스럽지 않다는 말이다. 과거 뇌 연구가 본격적이지 않았던 시대 사람들은 자아가 가슴 속에 있다고 여겼다 한다. 화가 나거나 사랑에 빠지면 심장이 반응하기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 MRI의 발달로 뇌의 비밀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뇌는 평균 체중 2% 정도 무게를 차지함에도 혈액의 25%와 몸의 에너지 20%를 쓴다고 알려졌다. 어쨌든 그런 뇌로 우주도 세상도 나도 규명할 수 있다. 사지를 움직일 수도 있고 가끔 엉뚱한 상상도 할 수 있는 나란 존재가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곳에 있다니 놀랍기도 하면서 대견하기도 하다.
고래로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의 의문을 가지며 살아왔다. 나는 그 답을 문과 남자가 과학 공부를 하면서 쓴 책에서 어렴풋이 찾을 수 있었다. 유시민 작가는 그의 저서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에서 “나는 무엇인가? 대답은 분명하다. 나는 뇌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주워들은 어쭙잖은 풍월이며 슬플 때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등 내 모든 것이 뇌 안에 저장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뉴런은 서로 연결함으로써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만들어 내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거꾸로 뉴런의 연결 패턴에 영향을 준다. ‘자아’가 ‘뇌’를 바꿀 수 있다. 자아가 뇌에 그저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뇌를 형성하고 바꾼다는 말이다.”라고도 한다. “내 뇌는 매 순간 퇴화하고 있다. 내 자아는 날마다 어리석어지는 중이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어지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내 뇌의 뉴런이 순조롭게 다양한 연결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책을 읽고 생각한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세상과 연대하며 낯선 곳을 여행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뇌에 새로운 데이터를 공급하는 것뿐이다. 어리석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유일한 방법이다.”라며 해결책도 제시한다.
미련이 남아 묵은 숟가락 하나도 맘먹고 버리지 못하는데 머릿속 정보는 어찌 그리 쉬이 빠져나가는 것인지. 그렇게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그래도 내 것인 것을 어쩌랴. 신경과 의사들은 뇌 퇴화의 예방과 진단 방법으로 오각형 그리기를 소개한다. 오각형을 나란히 겹치게 그리되 교집합 부분에서 다이아몬드형이 나오게 연습하라고 한다.
그래, 뇌 퇴화 속도도 늦추고 덜 어리석어지려면 오각형이라도 그리고 유시민 작가 말대로 독서하고 타인과 공감하며 소통할 수밖에 없겠다. 그리고 최대한 휴대전화에 덜 의지하고 뇌 속 데이터에 낯섦을 공급하며 자아를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손에 꼭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내려보다가 슬그머니 옆으로 밀어놓는다. 다섯 손가락으로 머리를 지그시 눌러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래도 아직 저 속보다 이 속에 나란 존재가 더 많이 저장되어 있을 테지. 조물주가 인간의 몸속에 쓸모없는 기관을 그냥 만들어 놓았을 리 없지. 아마도 조물주는 악어 같은 날카로운 이빨도 독수리같이 뛰어난 시력도 치타처럼 날랜 달리기 솜씨도 갖추지 못한 인간이 진정 안쓰러웠을지 모른다. 해서 조그마한 칩 같은 뇌라도 하나 머릿속 깊은 곳에 장착시켜 놓고 싶지 않았을까. 그래야 험하디험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며 안심하지 않았을까.
온종일 끙끙대던 단어가 저녁 무렵 갑자기 떠오를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읽었던 책 속 명문장이 반짝이며 뇌리에 빗금을 그을 때도 있다. 이럴 때면 얼토당토않은 상상이나 하는 내 뇌가 아직 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참으로 기뻐진다. 밤하늘 별을 세던 유년의 기억과 저물녘 까무룩 해지는 감정 등을 내 방식대로 저장해놓은 조각들이 뇌 안에 있다. 가끔 흔들리고 불확실하더라도 나만의 이야기와 향기를 잊지 않고 그래도 너, 여기까지 잘 왔다.



2025년 《한국산문》 5월호 발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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