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가방을 챙기는 내가 못마땅했는지 외할머니는 그예 한마디 했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간다, 그려!”섭섭한듯 다정함이 묻어나는 할머니의 눈빛에 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잠시 내려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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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은 우리 집에 비해 모든 것이 조금씩 작았다. 방 숫자도 적었고 마루도 좁았다. 마당도 부엌도 작았다. 늘 바쁘고 사람들로 벅적대던 우리 집보다는 조용하고 한가했다. 목이 찢어지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마저도 거칠게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점심을 먹고 책도 한 권을 읽었는데 밤은 한참 남은 듯했다. 저녁 안개가 마당에 퍼지는 시간이면 까닭 없이 서러움이 밀려왔다. 동생은 TV도 잘 보고 있었는데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다섯 밤을 자고 가자고 했건만, 금세 집이 그리웠다. 눈물이 나는 내 모습이 창피하기도 했다. 내 모습을 본 할머니가 참다못해 다 큰 것이 벌써 집에 가고 싶어 하냐며 서운함에 한마디 하는 소리였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부엌에서 급히 무언가를 준비해왔다. 땀범벅이 된 얼굴로 “이거 먹어봐라. 얼마나 맛있는지 집 생각이 뚝 달아날 게야.” 하시며 소반에 받쳐 온 콩가루 인절미 하나를 내 입속에 넣어주었다. 떡이 입천장에 붙어서 불편했지만 그 순간 할머니 온기 때문이었는지 이상하게 눈물이 멈췄다. 외가의 인절미는 우리 것에 비해 소박했다. 꼭 외할머니 집 같았다. 콩가루를 묻힌 것 오직 한 종류였다. 양이 많지도 않았다. 동글납작한 게 반듯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정겨웠고 따뜻했다.
인절미는 우리 집에서도 했다. 우리 인절미는 그와는 사뭇 달랐다. 주로 친할머니가 만드셨는데 정갈하고 깔끔했다. 떡을 하는 날이면 마당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가족이라 늘 분주했는데 인절미를 하는 날은 동네 청년들까지 몰려와 유난히 북새통이었다. 친할머니도 쪽 지고 은비녀를 꽂았는데 한복을 입은 자태가 늘 단정했다.
할머니가 소매를 걷고 찰밥을 이리저리 돌려놓으면, 기운이 센 청년들이 번갈아 가며 떡메로 힘차게 내리쳤다. 찰기나 거칠기 정도 등 떡 완성의 결정은 오직 할머니 판단에 따랐다. 인절미는 두 종류였다. 하나는 속이 하얀 거에 콩가루를 묻힌 것, 다른 하나는 쑥을 섞은 찰떡에 거피한 팥의 흰 앙금을 묻힌 것이었다. 할머니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 떡메질이 끝날 무렵이면 엄마는 교자상 다리를 접어 마당에 앉혔다. 할머니는 찰떡을 상에 올리고, 위에 가루를 뿌려가며 떡을 편평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흰 접시를 들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할머니의 떡 자르는 솜씨다. 소매를 다시 한번 야무지게 걷어붙인 할머니 얼굴에서는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처럼 결기가 느껴졌다.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고는 준비해 놓은 접시를 세워 교자상 위 떡을 잘랐다. 접시 날로 떡을 자르는 할머니의 모습은 칼춤을 추는 무당처럼 신령스러웠고, 접시가 지나간 떡은 마치 한석봉 어머니가 자른 것처럼 정확하고 반듯했다. 떡을 자르는 순간, 기운을 잃어가던 저녁 햇살이 할머니의 은비녀에 닿아 일순 반짝였다.
제사 때 쓸 떡은 큰 직사각형이고 무시로 먹을 것은 작은 사각형이었다. 직사각형으로 자른 떡의 귀를 맞춰 사각 나무 쟁반에 차곡차곡 쌓고서야 할머니는 허리를 폈다. 그리고 남동생을 찾아서 먹기 싫다고 도리질하는 아이 입으로 제일 먼저 인절미를 넣어주셨다. 동생이 간신히 한 개라도 먹으면 할머니 손은 접시에서 기특한 손주에게 옮겨 가 머리를 쓰다듬고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여기저기 나눌 떡을 배분하는 건 엄마의 일이었고 나는 소반에 받친 떡 접시를 이 집 저 집으로 나르기에 바빴다. 그런 날이면 해가 넘어가고 밤이 되어서야 엄마의 뒷설거지가 끝이 났다.
나는 인절미를 좋아하지 않았다. 떡보다 부드럽고 달콤한 빵이 열 배는 더 좋았다. 콩고물은 고소했지만, 쫀득한 떡은 입안에 들러붙어서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외할머니는 내가 가기만 하면 인절미를 했다. 혹시 그건 집에 가고 싶어 하는 나를 조금이라도 붙잡아 두려는, 할머니만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이제 외할머니보다 더 늙은 친정엄마를 볼 때면, 문득 외할머니 목소리가 떠오르곤 한다. 쪽을 지지 않은 엄마의 모습이, 외할머니와 참 많이 닮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