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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먹으며

라면 먹는 비법 공개

by 박은실

이제까지 내가 본 라면 먹는 장면 중 제일은 단연 영화 「내부자들」 속 장면이다. 오른손을 잃은 조폭 안상구가 왼손으로 라면을 먹는 장면인데 배우 이병헌의 연기가 명품이었다. 나무젓가락을 들고 거의 퍼먹다시피 하다가 너무 뜨거워 도로 뱉는 장면에서 관객들의 공감 어린 웃음소리가 극장 안에 퍼졌다. 그러나 나는 이병헌이 자신을 바라보던 졸개에게 던지는 “왜? 빙신이 끓여서 안 먹냐?”라는 대사에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어릴 적 나에게 라면은 별식과 다름없었다. 두 살 터울인 동생과 나는 밥보다도 국수보다도 라면을 훨씬 좋아했다. 국수는 부엌 찬장 구석에 늘 준비되어 있었지만, 라면은 엄마가 비장의 카드처럼 칭찬을 대신해서 주는 음식이라 여간해선 내놓지 않는 요리였다. 게다가 면보다는 밥을 선호하는 어르신들 입맛이 우선이라 더욱 그랬을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라면 그릇에 계란이 올려진 것이다.

“나도 계란!” 종손인 남동생의 외침에도 엄마는 끝내 계란을 나누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기 때문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제대로 대접받은 날이었다.

그날의 기억이 워낙 선명해서인지 라면을 끓여 남동생과 둘이 먹을 때면 평등의 의미로 계란 노른자를 기필코 터트려 섞어버리는 버릇이 생겼다.

자칭 ‘라면 전문가’라는 지인의 말을 빌리자면 라면은 고급 냄비에 끓이면 제맛이 살지 않는단다. 노란 양은 냄비에 끓여야 빨리 끓고 꼬들꼬들해진단다. 물과 함께 처음부터 스프를 넣어야 하고 물이 끓고 라면이 얼추 익으면 파를 송송 썰어 올려야 한다. 또 다른 비법은 콩나물을 넣고 끓이는 것인데 시원함을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숙취 해소용으로 적극 추천한단다. 달걀을 넣지 않아야 라면 고유의 맛을 살릴 수 있다. 그 외 다른 비법이 많지만, 기본적으로 양념을 많이 첨가하면 오히려 맛을 잃을 수 있단다.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법이야 다른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을 텐데 먹는 비법은 자기 것이 최고라는 지인이다. 그의 비결은 간결하고 단순하다. 유언처럼 비장한 지인의 비법 내용은 ‘끓인 라면을 절대 다른 그릇으로 옮기지 마라!’다. 양은 냄비째 놓고 반드시 뚜껑에 덜어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컵라면을 먹을 때도 같은 방법으로 먹으라고 당부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라면은 우리 동네 광진 정보 도서관 매점에서 파는 치즈라면이다. 내가 도서관에 가는 이유 중 첫 번째는 라면이다. 지인의 비법과 다르게 여기에서는 냉면 그릇에 나오는데 치즈 한 장이 꼬들꼬들한 라면 위에 올라가 있다. 젓가락으로 얼른 휘저어 퍼지기 전에 호호 불어가며 빨리 먹는다. 적당히 맵고 고소한 국물이 입 안에 맴돈다. 본디 나는 라면 국물을 싫어하는데 여기서 먹을 때는 국물까지 다 마시고 나서야 젓가락을 공손히 내려놓는다. 치즈라면을 먹으면 녹슨 기계에 기름칠이 된 듯 꼬불꼬불 구겨졌던 머릿속에서 명문장이 주르륵 나올 것 같다. 잔치국수보다도 헐한 3,000원짜리 분식 한 그릇이 내게는 왕후의 밥보다 귀하다.

국수와 라면은 모두 서민을 대표하는 음식이다. 같은 쪽빛에서 나왔지만 남색과 녹색이 다르듯, 같은 밀가루 음식이지만 두 음식이 주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내 기준으로 국수는 삶아내어 찬물에서 막 헹구었을 때 가장 맛있다. 라면은 불에서 보글보글 막 끓여 내렸을 때 가장 맛있다.


국수가 곧게 가르마 타 내려가 머리채 동여맨 고전 미인이라면 라면은 쪽 찐 머리 싹둑 자르고 뽀글뽀글 파마한 양장미인이라 하겠다. 국수가 은장도로 자결한 해쓱한 구절초라면 라면은 저마다 다른 사연 품어 안고 하롱하롱 떨어지는 봄날 벚꽃이라 하겠다. 국수가 곧게 쭉 뻗은 고속도로라면 라면은 굽이굽이 돌아가는 고갯길이라 하겠다.


라면이 꼬불꼬불한 까닭을 아는가? 누구에게라도 삶이란 구절양장! “라면은 외팔이 조폭에게도 귀남이 종손에게도 나름의 사연과 추억을 함축해 놓은 저장고다.”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이따금 삶이 지루해 샛길로 빠져보고 싶을 때, 나는 라면을 뜨겁게 끓여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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