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식구 송년 모임 노래방에서였다. 그때 나는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로 시작되는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라는 노래를 부르려 준비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전주가 끝나고 노래를 막 시작하려는데 둘째 언니가 옆에 와서는 “으이구, 아직까지 얼어 죽을 놈의 사랑 타령이냐?”라며 면박을 주었다. 남녀 간 사랑 반응의 최고점을 찍는 시점이 3년이라는 원리가 맞는다면 아이를 둘이나 낳고 10년이 지난 시점은 환상이 세 번도 넘게 깨졌을 시기였다. 그런데도 그 노래가 입에 붙어있다는 건, 적어도 그때까지는 가슴속이 짜르르해지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를 받쳐주는 디딤돌이긴 했었나 보다.
초패왕楚霸王 항우項羽는 대대로 장군을 역임한 귀족 출신으로 8척 장신에 힘이 장사였다. 부하를 극진히 여기지만 적 앞에서는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성격이었다. 상상하건대 아마도 커다란 어깨에 부리부리한 눈매가 영화배우 정우성급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정우성에게는 명마名馬와 아리따운 애인이 있었다. 명마의 이름은 ‘추騅’였고 여인은 ‘우희虞姬’로 불렸다. 드디어 전쟁에서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다는 그에게 최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랜 전쟁으로 전력은 저하되고 식량도 바닥이 나있었다. 이때 적의 야영 쪽에서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노랫소리를 듣고 초나라 군사가 항복했다고 여겨 전의를 상실한 군사들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때 생긴 말이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란다. 마지막을 감지한 정우성은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처소에서 나와 즉흥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力拔山兮氣蓋世(역발산혜기개세) 時不利兮騶不逝(시불리혜추불서) 騶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내하) 虞兮虞兮奈若何(우혜우혜내약하) 산을 뽑는 힘 천하를 제압하는 기백도 이제는 쓸모가 없네 시운이 불리하여 오추마조차 내닫지 않도다 추여, 너마저 걷지 않으니 아, 우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해야 할까
-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
전장을 누비는 항우 곁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우희도 이 시를 따라서 읊었단다. 사마천의 『사기』에 항우의 여인은 우희밖에 나오지 않으니 그의 사랑과 정열은 오직 우희에게만 향했던 모양이다. 우희 역에는 청순가련형인 배우 수애가 어울릴 것 같다. 천하의 역발산기개세 항우도 그녀의 촉촉한 눈빛 앞에서만은 티라미수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렸었나 보다. 계집은 저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얼굴을 다듬는다던가. 전장의 막사를 돌면서도 꽁꽁 언 개울물을 깨서 세수를 하고 거울 앞에서 단장했을 그녀를 그려본다. 새봄이 오면 군사들 모르게 얼음장 옆 갯버들강아지를 꺾어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간지럽혔을지 모를 남자 항우. 그 남자의 손길을 느끼며 갯버들가지를 창가에 꽂아두고 배시시 진달래빛 미소를 지었을지 모를 여자 우희. 일설에 의하면 자신이 항우에게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 그녀가 항우의 즉흥시에 답시를 올리고 그의 칼을 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는데 정설인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싸우던 항우는 장강長江 유역 오강烏江까지 후퇴하게 된다. 부하에게 아끼던 애마 추를 죽이라 당부하고 옆에 찬 칼을 빼 자결함으로써 최후를 맞이한다. 이로써 초나라 항우는 후대에 희대의 로맨티시스트로 등극하게 된다.
그날 이후로도 친정 가족 연말 모임은 계속되었고 한동안 노래방 방문도 이어졌지만 나는 그 노래 「사랑밖엔 난 몰라」로 다시 마이크를 잡진 않았다. 그런데 수많은 영웅호걸의 지략과 역사가 나오는 사마천의 『사기』를 읽다가 정우성과 수애 주연의 역대급 사랑 얘기가 끝난 이후 급 흥미를 잃은 걸 보면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람살이에는 그저 사랑만 한 게 없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우희에게 또다시 전장을 돌며 추위에 떨어도 사랑을 위해 그렇게 하겠느냐 묻는다면 그러마 답할까? 항우의 스윗한 눈빛을 마주하고 든든한 어깨에 기댈 수만 있다면 전쟁의 공포도 굶주림도 무섭지 않다고 답할까. 사랑이란 그런 것일까. 흔하디 흔한 갯버들강아지만 보아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불현듯 목덜미가 간지러워지는 것. 가슴속이 온통 연분홍으로 물들었던 새봄의 기억 하나만으로 다시 돌아가 죽는다고 해도 기꺼이 후회하지 않는, 그런 것일까.
돌아올 겨울 송년 모임에서는 그동안 묵혀두었던 이 노래를 꺼내 불러봐야겠다. 내 맘대로 캐스팅한 우희인 척 수애가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