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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이병률 산문집

by 박은실

이야기 하나 #1

'열정'이라는 말

열정이라는 말에는 한 철 태양이 머물다 지나간 들판의 냄새가 있고, 이른 새벽 푸석푸석한 이마를 쓸어 올리며 무언가를 끼적이는 청년의 눈빛이 스며 있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타고 떠날 수 있는 보너스 항공권 한 장에 들어 있는 울렁거림이 있다. 열정은 그런 것이다. 그걸 모르면 숨이 막힐 것 같은 어둠에 놓여 있는 상태가 되고, 그걸 갖지 아니하면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낯선 도시에 떨어진 그 암담함과 다르지 않다. 사랑의 열정이 그러했고 청춘의 열정이 그러했고 먼 곳을 향한 열정이 그러했듯 가지고 있는 자와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 것. 이를테면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이야기 열 하나#11

어쩌면 탱고

그날, 탱고 공연을 보고 나온 날,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밤하늘에 초승달이 위태롭게 떠 있던 날. 골목길을 혼자 걷다가 골목길을 돌기 위해 몸을 꺾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탱고 스텝을 흉내 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 웃었다. 그날 본 탱고 공연이 너무 대단해서 다음날 아침, 눈을 뜨면 탱고 학교에 가보겠다 맘을 먹었다.

(....)

내가 자꾸 발을 밟아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두 손을 들어 보였더니 강사는 벽에 붙여놓은 사진 한 장을 가리킨다. 알 파치노가 주연한 『여인의 향기』포스터였는데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다.

「잘 못하면 스텝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추면 돼요.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지요. 」

그 문구를 보는 순가, 내 앞에 벌어진 모든 상황들이 로맨틱하게 다가온다.

(....)

조금이라도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절대 출 수 없는 춤. 저런 춤을 추는데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순간, 벽에 붙은 포스터의 글씨가 이렇게 읽히기 시작한다.

「사랑을 하면 마음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놔두면 돼요. 마음이 엉키면 그게 바로 사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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