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맘대로 캐스팅 2

사마천의 사기와 부부의 세계

by 박은실

**오늘은 연재 하는 날이 아닙니다. 내일이 설 명절 연휴 시작이며, 맏며느리인 작가가 많이 바쁜 관계로 오늘 연재를 미리 발행합니다. 원래 오늘은 책소개를 하는 날입니다. 앞 글과 연달아 읽으면 좋으실 듯하여 규칙을 바꿔 이 글을 올리는 점 양해 바랍니다.



지루한 일상을 뒤덮을 만한 묵직한 무언가가 필요해서 사마천의 『사기』를 들었다. 그런데 뭐 눈에 뭐만 보인다고 독자가 듬직하지 못한 까닭에서였을까. 읽다 보니 묵직한 무엇보다는 초패왕 항우와 우희의 간절하고 애절하고 절절하기까지 한 러브 스토리에 눈길이 멈춰 섰다. 조금 더 읽어보니 요즘 한창 맛 들이기 시작한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와 조금은 흡사한 이야기에 다시 한번 눈길이 멈춰 섰다. 「부부의 세계」는 남편의 외도 때문에 진행한 이혼이 무서운 복수전으로 이어져 스릴러물 같은 느낌을 주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와 어딘가 닮은 듯한, 항우의 라이벌 유방의 부부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초楚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긴 유방은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사람을 잘 쓰는 현실성 있는 사람이었다. 로맨티시스트 항우에게 우희라는 여자가 있었듯 그에게도 여인이 있었다. 여치呂雉라는 여인인데 여치의 아비가 보매 유방에게서 왕의 기질이 보여 딸을 시집보냈다고 한다. 조강지처인 여치는 유방이 왕위에 오르기 전 집안을 돌보지 않는 그를 대신해 농사일과 양잠을 하며 가정을 꾸렸고 부모에게도 효성이 지극했다. 자녀로는 혜제와 노원 공주를 두었으며 초나라 군대에 잡혀 포로 생활을 하기도 했다.

현실과 잘 타협하고 은근히 여자를 좋아하는 유방은 상상하건대 회장 딸과 불륜을 저질렀고 처세에 능한 「부부의 세계」의 남자주인공 박해준급이 아니었을까 한다. 훗날 여후呂后라 불리게 된 여치 역으로는 악역도 능히 소화할 것 같고 드라마에서 능력 있는 조강지처 역으로 열연 중인 배우 김희애가 어울릴 것 같다. 해준은 희애의 내조 힘으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한나라 황제가 된 해준에게는 척부인이라는 사랑하는 새 여자가 생겼다. 척부인에게도 아들이 있어서 그녀는 틈만 나면 자기 아들을 태자로 삼아달라고 눈물로 간청했다. 어느새 해준도 이미 태자로 삼은 혜제와 척부인 아들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었고 마음은 후자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해준이 척부인에게 마음을 쏟았으니 사랑을 빼앗긴 여자의 한은 깊고도 짙었다. 해준의 천하 통일을 도와 태후가 된 김희애는 가슴 깊이 시퍼런 칼날을 다듬고 품었다.

사랑과 질투는 한 끗 차이라던가. 결국 박해준 사망 후 혜제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때부터 여후의 피비린내 나는 악랄한 사랑과 전쟁이 막을 열게 된다. 그녀는 제일 먼저 척부인을 잡아다 손과 발을 잘랐다. 눈을 도려내고 귀를 불에 지져서 오려내고 약을 먹여 목 줄기를 태워버렸다. 그리고 변소에다 버린 다음 ‘사람 돼지’라 이름 붙였다. 이 광경을 왕이 된 아들 혜제에게 직접 보여주었고, 그날 이후 마음 약한 혜제는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당나라 측천무, 청나라 서태후와 함께 중국 3대 악녀로 불리는 여태후呂太后는 팔을 걷어붙이고 실권을 장악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심지어 혜제 후궁 아들도 은밀히 죽이고 말았다. 사랑을 얻지 못해 차갑게 얼어버린 가슴속을 그녀는 권력으로 불태우고 싶었던 것일까.

귀족 출신의 천하장사급 무사, 항우와의 전쟁에서 거둔 단 한 번의 승리로 유방은 천하를 얻었다. 지략가 범증范曾의 충언도 귀담아듣지 않던 항우와 달리 유방은 한신韓信을 비롯해 소하蕭何, 장량張良 등 장수 하나하나의 능력을 인정하고 공을 허투루 무시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약 황제 유방이 지금껏 고생한 여후가 지나간 세월을 모두 잊을 수 있도록 다정한 눈빛과 그윽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라도 불러주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그녀도 「사랑밖엔 난 몰라」를 답가로 부르며 핏빛 칼날을 집어던지고 후덕한 황후로 역사에 남진 않았을까.

역사서란 굵직한 사건들을 연대별로 엮어놓고 밑도 끝도 없이 외우라 강요하는 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기』는 편년체로 쓰였지만, 시대별 권선징악을 가르치는 도덕책은 아니었다.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지 판가름해 주는 책도 아니었다.

“그때는 그랬어. 그런 사람이 있었대. 맞고 틀리고는 네가 알아서 생각해.”라고 열린 결말을 보여준 책이었다. 책장을 넘기다 보니 장엄한 대서사시 같은 항우와 우희의 애틋한 사랑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2천 년을 뛰어넘어서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한없이 고왔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하는 유방과 여태후 이야기도 담겨있었다. 이래서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고 시간을 돌아 흘러서 현재를 보여준다고 하는 것일까.

역사가 영웅의 것만이 아니듯 사랑도 영웅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역사란 누구의 것이며 누가 만드나.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꽃처럼 지지고 볶는 우리네 일상도 훗날 역사서의 한 페이지가 되지는 않을는지 생각하게 된다.
다음에 읽을 때는 묵직한 무언가에 반드시 눈길이 머무르길 기대하면서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23987814


keyword
이전 08화내 맘대로 캐스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