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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병률 여행 산문집

by 박은실

'여행 수필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책이다.

그리고 씹어먹고 싶은 수필집 중 하나다.

여행수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이것만은 예외다.

같은 여행기라도 이토록 가슴속을 후벼 파는 건 없었다.

하여 두 번 완독 했다. 그리고 가끔 열어보고 또다시 짜르르 전율을 느끼곤 한다.

이병률 산문집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 책 속 글을 모두 다 옮겨 적고 싶지만 내 손가락에게 미안해서 몇 문장만 올린다.


다른 건 몰라도 아랫글은 꼭 읽어보길 권한다.

7# 뜨겁고 매운 한 그릇

이 글은 가끔씩 뇌 속에서 살아나 가슴을 적시고 간다.

차마 옮기지 못하고 말줄임표로 대신한다.

(...)


11#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


11월과 12월 사이를 좋아합니다. 그건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조금씩 눈비가 뿌리고 있으니 어쩌면 잠시 후에 눈송이로 바뀌어 이 저녁을 온통 하얗게 뒤덮을지도 모르니 이곳 강변의 여관에서 자고 가기로 합니다. 창문을 열어놓고 맥주를 한 병 마시는데 몸이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네요. 이야기할 사람이 없으면 술을 마시지 말라고 몸이 말을 걸어옵니다. 그럼요, 술은 정말 정말 좋은 사람이랑 같이 하지 않으면 그냥 물이지요. 수돗물.

(...)

삿포로에 갈까요. 멍을 덮으러, 열을 덮으러 삿포로에 가서 쏟아지는 눈밭을 보며 술을 마실까요.

(...)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29#

나는 물들기 쉬운 사람.

많은 색깔에 물들었으며 많은 색깔을 버리기도 했다. 내 것인 듯하여 껴안았고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지워 없애거나, 곧 다른 색으로 이사가기도 했다.

(...)

당신이 좋다,라는 말은 당신의 색깔이 좋다는 말이며, 당신의 색깔로 옮겨가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당신 색깔이 맘에 들이 않는다,라는 말은 무의식적으로 했을 경우, 당신과 나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지켜야 하는 사이라는 사실과 내 전부를 보이지 않겠다는 결정을 동시에 통보하는 것이다.




흔히 책 맨 앞 목록은 작가의 말이 자리한다.

그런데 이 책에는 작가의 말이 없다. 그 대신 이렇게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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