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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28. 2022

[기억저장소] #4. 변화

 남자가 기억을 모두 지우고 나갈 때까지 서윤의 질문은 계속됐다. 기억을 지우는 동안에도 계속 서윤이 신경 쓰여 남자의 기억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손님이 나가고 문이 닫힐 때까지도 서윤은 도준 옆에 바싹 붙어있었다.

"왜 다시 찾아온 겁니까?"

"골목 돌아서 나갔다 다시 돌아오라면서요. 그러면 아무 말도 안 한다고 누가 그랬는데?"

순간 도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분명 이상했다. 문자를 받고 온 사람도 다시 올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서윤은 이곳을  마치 제 집인 양 드나들고 있었다. 도준 애써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말했다.

"어쨌든, 이건 명백한 주거침입입니다. 돌아가세요."

도준이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었다.

"싫어요."

"네?"

"싫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싫다니?"

"싫은 것도 싫은 건데, 나갈 수도 없어요. 내가 어디서 왔는지, 왜 여기로 오게 됐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거든요."

도준의 말문이 막혔다. 이곳을 나가기 싫어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나가지 않겠다는 건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 것이다. 기억을 지워주는 곳에서 이미 기억을 잊은 사람과 함께 한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윤을 계속 여기 머무르게 할 수는 없었다. 도준은 숨을 깊게 내쉬고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그쪽 사정이 딱한 건 알겠어요. 알겠는데. 여기는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계속 아무나 들어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서윤의 목소리에 날이 서있었다.

"말하자면 긴데 아무튼.."

"말해봐요. 여기가 그렇게 대단한 곳이고, 정말로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면 가지 말라 그래도 갈 테니까."

서윤이 단호하게 말했다. 손님 중에도 저런 사람들이 있었다. 나쁜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바꿔달라며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우던 사람들. 서윤의 눈은 그 사람들의 고집스러웠던 눈과 닮아있었다. 도준은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해가 어두운 밤하늘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사람을 이 밤에 무작정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준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오늘만이에요."

"진짜요?"

"오늘만요. 내일 아침에 바로 이곳을 나가세요."

"그건 내일 봐서요."

자신의 뜻대로 된 이 상황을 즐기는지 서윤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억저장소는 건물 세 개가 모여있는 구조였다. 기억을 지우고 보관하는 기억의 방과 욕실. 그리고 나머지 건물 하나. 남은 건물에는 부엌과 침실, 거실이 모두 붙어있었다. 기억저장소와는 달리 도준이 생활하는 집 내부는 흰색 계열의 인테리어로 깔끔했다. 도준을 따라 거실로 들어온 서윤은 깔끔한 내부가 신기하다는 듯 여기저기 둘러보고 다녔다. 도준은 그런 서윤을 애써 무시한 채, 부엌으로 향했다. 평소 요리를 즐겨하는 탓에 다행히 냉장고에는 여러  식재료가 있었다. 이 정도면, 저녁 한 끼 해결하는 정도엔 충분한 양이었다. 도준은 사용할 식재료를 차곡차곡 식탁에 올려두기 시작했다. 서윤은 집 구경을 모두 마쳤는지, 도준 주위를 기웃댔다.

"저녁 하려고요?"

"밥은 먹어야죠."

"그렇게 쌀쌀맞게 굴더니 밥은 주네요?"

도준이 하던 칼질을 멈추고 서윤을 째려봤다. 서윤은 익살스러운 눈짓과 함께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근데 요리 잘해요? 칼질이 보통은 아니네요."

"여기 혼자 있으려면 적당한 취미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엔 요리가 나름 적당하고."

도준은 간단한 말과 함께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서윤은 그런 도준이 의외라는 듯 쳐다봤다. 칼질도 칼질이지만, 정리도 특별했다. 뭐하나 할 때마다 치우는 탓에 부엌이 더러워질 새가 없었다. 마치 도준의 성격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하나하나 치우면서 언제 해요. 빨리 요리하고 나중에 치우면 되지"

"이렇게 하는 게 편해요."

"아니 이렇게 해서 언제 다해요!"

서윤이 도준을 도우려는 듯 소매를 걷어올렸다. 당황한 도준이 재빨리 서윤을 막아세웠다.

"제발 좀 앉아있어요. 금방 끝나니까. 자꾸 그러면 다시 내쫓을 겁니다."

서윤은 하는 수 없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도준이 자기를 쫓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한 번 봐준다는 생각에서였다. 잠시 동안 집 안이 고요했다. 하지만 서윤은 그런 고요함이 싫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도준을 향해 계속해서 이어지는 질문공세에 도준은 영혼 없는 단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서윤은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주말에는 보통 무엇을 하며, 계속 이곳에 지내는지 같은. 쓸데없는 질문 뒤로 한 가지 질문이 덧붙여졌다.

"근데 어쩌다 여기를 관리하고 있는 거예요? 혹시 과거에 똑같이 기억을 지운 거예요?"

도준이 하던 일을 멈췄다. 서윤도 실례가 되는 질문이었다는 걸 뒤늦게 인지하고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에 꽤나 오래도록 긴 침묵이 이어졌다. 적막한 공간 속 찌개 끓는 소리만 어색하게 이어졌다.


 도준 혼자 지내기에 부족함 없는 크기였지만, 서윤이 있다면 말이 달라졌다. 침실부터 문제였다. 이 자기도 충분한 침대였지만, 서윤과 같이 침대를 쓸 수는 없었다. 렇다고 서윤을 바닥에서 재우는 것도 말이 안 됐다. 하는 수 없이 서윤에게 침대를 양보했다. 그마저도 자신이 바닥에서 자겠다며 한사코 고집을 부리는 서윤을 겨우 설득한 결과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서윤은 다음날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나가지 못했다. 서윤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도, 가족도, 친구도. 모두 기억하지 못했다. 서윤이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본인의 이름 세 글자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며칠 동안 서윤을 이곳에서 지내게 했다.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을 강제로 내보내는 것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얼마나 머무를지 알 수 없었지만, 기간이 꽤 길어질 것 같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준비를 해야 했다. 이불과 베개는 물론이고 생활용품 역시 도준의 것만 있다. 언제까지 같이 지낼지 알 수 없으나, 그때까지 불편하게 살 수는 없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요."

"나갔다 온다고요?"

"네. 손님이 오면 잠시 기다려달라고 해주세요."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첫 번째 골목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단순한 길. 하지만 이 단순한 길을 얼마 만에 나온 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기억을 지운 뒤로는 급한 일이 아니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도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그래서 잊었던 그 기억에 대해 얘기할까 봐.

 오랜만에 마주하는 거리가 조금은 낯설었다. 현대식으로 인테리어 된 건물과 한옥들이 마구 섞여있는 길. 그 길을 따라 은행나무가 일렬로 심어진 거리. 도준은 거리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거리엔 따스한 햇빛이 가득했다. 조금 뜨거웠지만,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 덕에 덥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거리는 조용했다. 길을 따라 걷는 도준의 눈에 한 카페가 들어왔다. 작은 카페.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고소한 빵 냄새와 원두향은 도준의 발걸음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도준이 잠시 망설이다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 안에 들어서자 빵 냄새가 더 강렬하게 코를 자극했다. 갓 구워 낸 빵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카페에 손님은 도준 밖에 없었다. 도준은 천천히 빵을 골랐다. 버터와 바질, 딸기가 올라간 각종 스콘들과 케이크가 즐비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빵을 골랐다. 서윤이 좋아할 만한 스콘 몇 개를 가지고 계산대로 향했다.

"이거랑 에스프레소 두 잔 테이크아웃이요."

서윤의 것까지 함께 포장했다. 커피가 식을게 분명하니, 에스프레소를 가져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빵도 함께 포장해드릴까요?"

"네."

점원이 포장을 마친 빵을 건넸다. 인사를 하고 나가려던 찰나 점원이 도준에게 말을 건넸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여자친구분이랑 자주 오시더니. 요새 통 안보이셔서 이사라도 가신 건가 했거든요."

도준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도준이 걱정했던 바로 그 상황. 인사도 없이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왔다. 방금 들은 말을 잊기 위해 애써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억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억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걷던 이 거리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밖으로 나온 목적도 잊은 채 도준이 서둘러 기억저장소로 향했다. 돌아가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다. 오늘의 기억은 다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다. 다시 돌아간다면, 언제나처럼 아침햇살에 눈을 뜰 것이고, 커피 한 잔과 함께 툇마루에서 여유를 즐길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도준이 골목으로 사라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고 온 스콘과 커피를 식탁에 내팽개치고 툇마루에 앉았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서서히 평상시 심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제야 서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대수롭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을 가로질러 가던 중 기억의 방에서 웬 말소리가 들려왔다. 서윤과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낯선 사람의 목소리라면 분명 손님일 것이다. 그런 손님과 서윤이 기억의 방에서 알 수 없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불안감에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기억을 지우는 게 맞을까요?"

"그만!"

서윤의 말에 도준이 다급하게 외쳤다. 놀란 서윤과 남자가 도준을 쳐다봤다. 도준은 서윤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챘다. 남자를 방에 놔둔 채 서윤을 데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지금 뭐하자는 거예요?"

도준이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서윤이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아니 나는 그냥.. 손님이 왔길래 저 방으로 안내해준 거예요."

"기억을 지우는 게 맞냐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 그건... 그냥 할 얘기도 없고 해서 얘기 좀 했어요. 자기 여자친구였던 사람과의 기억을 지우고 싶다길래, 지우는 게 맞을까 질문했던거고."

"나가요."

"네?"

"나가라고요. 그쪽 사정이 어찌 됐던 모르겠고, 그냥 나가라고요!"

예상치 못한 도준의 격한 반응에 서윤 눈동자가 흔들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도준이 이토록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서윤의 고집스러운 눈이 꺾였다. 서윤은  곧 체념한 듯 문 밖으로 사라졌다. 도준 한동안 가쁜 숨을 내었다. 서윤이 나가고도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무슨 일 있나요?"

남자가 뻘쭘한 듯 방에서 나와 도준에게 물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아무 일도 아니라며 남자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윤만 아니라면, 다를 것 없던 평범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서윤이라는 존재로 인해 평범했던 일상이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남자는 기억을 지운 후 문 밖으로 사라졌다. 적막했다. 평소와 같은 고요함이었지만, 어느새 서윤이 있던 그 짧은 시간에 적응한 듯했다. 계속해서 서윤이 신경이 쓰였다. 분명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집 밖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걸까. 생각하지 않으려 고개를 휙휙 저어댔지만, 도준도 모르는 새 몸은 문 밖을 향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윤은 대문 바로 옆 벽에 쪼그려 앉아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도준 뻘쭘해하며 말을 건넸다.

"진짜 기억  나 봐요?"

"미안하면 그냥 미안하다고 해요."

"제가 왜 안합니까. 그건 그쪽이 먼저.."

도준도 모르게 다시 언성이 높아졌다. 도준을 바라보던 서윤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당황한 도준이 서윤을 달랬다.

"일단 들어가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됐어요. 나도 나가라는 사람 있는 곳에서 눈치 보면서 있고 싶지 않아요."

"아무런 기억도 안 난다면서요. 일단 들어가서.."

"됐다고요!"

단단히 뿔이 나있었다. 이런 상황이 처음인 도준어쩔 줄 몰라했다. 등이라도 토닥여줘야 하는 걸까. 하지만 곧 포기하고 서윤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서윤이 고개를 살짝 돌려 도준을 쳐다봤다. 도준은 말없이 한참을 하늘만 바라봤다. 골목 담벼락 위로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궁금하다고 했죠. 내 과거."

도준은 천천히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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